진정성만큼 요즘 최고의 덕목으로 각광받는 키워드도 드물 것 같다. 개인적 대인 관계든, 조직을 이끄는 리더십이든, 상품과 서비스 같은 경제적 산출물을 띄우고 브랜드 이미지를 창출하는 마케팅 전략이든 다양한 영역에서 그렇다. TV 속 예능 버라이어티 캐릭터조차 진정성이 있어 보여야 인기를 얻는다. 이렇듯 흔히 진정성을 진실과 가식을 나누는 바로미터처럼 여기지만 실제로는 완전한 진실도, 완전한 가식도 없을지 모른다며 보다 유연한 해석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있다. 인간사에는 유일하거나 영원불멸한 정체성 자체가 존재하기 힘들다는 논리에서다.
진정성은 요즘 가장 빈번히, 그리고 관심 있게 회자되는 단어 중 하나일 것이다. 대인 관계에서도 진정성 있는 태도를 촉구하고, 조직에서는 진정성을 리더십의 핵심 기준으로 내세우면서 ‘진성 리더십’이라는 용어를 강조하기도 한다. 상품이나 서비스를 판매할 때도 진정성이 녹아든 마케팅을 펼치라는 목소리가 심심찮게 들린다. 심지어 TV 예능 프로그램에서조차 진정성의 면모가 엿보이기를 상당수가 기대하는 분위기다. 다들 가짜에 신물이 난 모양새다. 이처럼 다수가 갈망하는 진정성이 오늘날 인간 사회에서 중요한 키워드, 혹자는 트렌드라 부르기도 할 만큼 크게 자리매김하고 있지만 우리는 정말로 ‘진정성 있다’는 게 무슨 뜻인지 제대로 알고 있을까? 진실하기만 하면 다 좋은 것일까? 가식은 옳지 않은 것일까? 어떤 이들은 오해의 껍질이 진정성이란 단어를 겹겹이 둘러싼 경우가 꽤 많다고 말한다. 지금이야말로 진정성에 대해 심도 있게 고찰해온 이들의 주장에 귀기울여봄직한 시점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흔히 진정성이 있다고 할 때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다는 의미를 떠올리곤 한다. 내가 생각하는 나 자신에 맞게 행동하고 말하지 못하면 스스로 진정성이 부족하다고 여기는 이유다. 그런데 문제는 누군가가 내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이미지에 어긋난 언행을 해도 ‘진정성 결여’를 외친다는 것이다. 게다가 점점 많은 이들이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진실과 가식으로 나눠 생각하고, 때때로 옳고 그름의 문제로 치부해버리기도 한다. ‘체험 경제’ 이론으로 명성이 높은 학자인 제임스 길모어와 조지프 파인 2세는 “진실한 건 무엇이냐”라는 질문이 “진리는 무엇이냐”라는 질문과는 같지 않다는 점을 기억하라고 주문한다.
‘진정한’이라는 단어는 원래 예술 작품을 가리킬 때 모사품(copy)이나 복제품(replica)이 아닌 ‘진짜(authentic)’라는 맥락에서 자주 쓰였다고 한다. 미술품이나 원석이 중요한 보석 같은 경우에는 당연히 진품을 중시할 수밖에 없다. 그래야 본래의 의도나 특성이 그대로 묻어나고, 가치도 높으니까(게다가 모조품은 불법이기도 하므로 ‘옳고 그름’의 문제에도 걸린다). 하지만 대인 관계나 직장 생활, 마케팅 전략처럼 심리 요소와 역학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기에 진정성을 쉽게 단정지을 수 없는 데다 가치의 역학도 변화하는 영역에서는 좀 달리 바라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개개인의 실생활과 직접 엮여 있지도 않은 TV 속 세상을 생각해보라. ‘연기’와 ‘설정’을 어느 정도 전제로 하는 방송인데도 보다 진실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는 관찰 예능이 대세일 정도로 요즘 진정성에 대한 수요는 높다. 그런데 출연자가 좋은 인상을 주려 하거나 지나치게 튀면 가식적이라는 반응이 나오기도 하고, 그렇다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 자칫 재미가 떨어지기도 해서 “다큐 찍냐”라는 비아냥이 불거지기도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방송 관계자들은 대중이 진정성을 자주 운운하지만 실제로 ‘100% 민낯’을 원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말한다. 어차피 공급자와 수요자의 목적, 그리고 가치의 중심이 전부 ‘엔터테인먼트’에 있다면 진실과 가식의 경계를 절묘하게 넘나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차피 방송인으로서 진정성은 배우든, 개그맨이든, 가수든 이미 직업적인 이미지와 프로 정신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계의 미학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맞닥뜨리는 다른 영역에서도 중요한 함의를 지닐 듯하다. 나와 상대방,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생태계 차원의 ‘가치’를 고려한다면 말이다. 완벽한 자기기만이나 거짓이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많은 경우 진실과 가식의 경계를 상정하는 건 자신의 괜한 죄책감이나 염려일 뿐, 현실적으로는 여러모로 해가 될 수도 있는 ‘아마추어적인 사고’라고 얘기하는 전문가들이 있다. 실제로도 우리 스스로도 내 안에 있는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구분하기 힘든 경우가 더러 있지 않은가? 프랑스 경영대학원 인시아드의 허미니아 아이바라 교수는 자아 성찰을 잘하는 사람들이 진정성 때문에 괴로워하는 이유는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 한 가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녀는 최근 세계적인 경영지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HBR)>에 게재한 ‘진정성의 역설(The Authenticity Paradox)’이라는 글에서 특히 조직의 사다리를 올라가면서 보다 책임감 있는 리더 역할을 맡으면 진정성 때문에 더 힘들어하는 예가 많은데, ‘스스로 생각하는’ 본연의 성향을 거스르면 본인이 사기꾼처럼 느껴질 수 있어서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가면을 쓰고 있다는 명언도 있듯이, 자아에는 여러 가지 모습이 있는 법이다. 그러므로 역할이나 상황이 달라지면 그에 맞는 모습을 끄집어내거나 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아이바라 교수는 말한다. 언뜻 진심을 드러내면 알아줄 거라고 착각하지만, 생각과 감정 하나하나까지 드러내면서 완벽하게 투명해진다는 건 비현실적일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다는 논리다. 조직 생활을 예로 들자면 새로 부서장을 맡은 사람이 “나 사실 이 일이 두려워”라고 솔직하게 말하면 ‘인간적’이라고 느낄지는 몰라도 오히려 부하 직원들이 덩달아 불안해하고 불신하는 바람에 일이 어그러지는 경우를 경험해본 이들도 있을 것이다. “저 사람 변했어”라는 쓴소리를 들을지언정 자신감과 신뢰를 불어넣는 리더십이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물론 지나치게 권위적으로 굴거나 으스대는 식의 변모가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아이바라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리더십의 관점에서 볼 때 자신이 다소 가식적으로 느껴지더라도 상황에 따라 다른 모습과 태도를 보이는 ‘유연한 진정성’을 갖출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고객에게 상품과 서비스를 판매하는 기업에도 이러한 유연성은 중요하다. 진정성 있는 브랜드 이미지를 갖춘 기업이 21세기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목소리가 거세게 울려 퍼지고 있지만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한다면 스스로 놓은 덫에 걸릴 수도 있다. 일단 내뱉은 말을 실천하지 못하거나, 애써 구축한 이미지와 부합되지 않는 행동을 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기 때문이다. 제임스 길모어와 조지프 파인 2세는 바로 이런 이유에서 자사가 진정성이 있다고 홍보한 기업들은 양날의 검을 쥔 셈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이들은 <진정성의 힘>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조언했다. “진정성을 위한 규범은 경영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될 수도 있지만 결코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예컨대 K마트, 유나이티드 항공사, 제너럴 모터스 같은 기업들은 비효율적인 공급망, 고비용 구조, 저품질 생산품의 문제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진정성의 연출이나 체험의 부각에 주력해서는 안 된다.” 남들이 한다고 어설프게 따라 하는 식으로 진정성 마케팅에 열을 올릴 게 아니라 기본에 충실하라는 얘기다. 심지어 소비자와의 접점이 많고 공감 빈도가 높다면 진정성의 면모를 남용하면서 홍보를 펼치는 기업들은 진실이 탄로 났을 때 치명적인 이미지 손상을 입기도 한다. ‘뒤통수’라는 쉽게 떨쳐내기 힘든 오명을 안으면서 말이다.
물론 진정성 마케팅으로 훈훈한 성과를 거둔 사례도 눈여겨볼 필요는 있다. 미국 홍보 에이전시 콘 앤드 울프(Cohn and Wolfe)는 지난해 ‘가장 진정성 있는 20대 브랜드’를 발표했는데, 이 목록에서는 월마트, 스타벅스, 아마존, 애플, 타겟 등의 기업이 가장 윗자리를 차지했다. 대중적인 인지도와 인기를 자랑하는 기업들이기는 하지만 반드시 우량 기업이나 브랜드 가치가 높은 순서대로라고도 할 수 없다(예컨대 막강 브랜드를 자랑하는 맥도날드는 7위에 그쳤다). 진정성이 높다고 여겨지는 기업은 저마다 다른 이유로 그런 대접을 받는다. 비누 같은 상품을 만들어내는 기업이라면 천연 원재료 같은 요소에서도 진정성을 느끼며, 애플 같은 경우에는 제품 디자인의 독창성에서도 진정성을 느낀다고 분석된다. 호텔, 항공 같은 서비스 영역에서는 손님을 진실로 대하는 봉사와 배려 정신에서 진정성의 가부가 판가름된다고 한다. 또 스타벅스처럼 ‘체험 경제’의 대표 주자로 꼽히는 경우에는 개인의 열망을 끌어내는 연관성이 중요하다. 커피라는 문화를 진정성 있게 공유하려 한다는 뜻을 매장에서 전달하도록 노력한 덕분이라는 것이다(물론 매장이 전 지구적으로 엄청나게 확장되면서 그러한 기조를 유지하는 데 한계를 맞았다는 평도 듣지만).
경영 전문가들은 이처럼 자신이 진실하다는 메시지를 꾸준히 전달하는 활동을 ‘진정성의 연출’이라고 일컫는다. 이러한 노력이 성공을 거두려면 소비자가 그러한 움직임을 인지하고 그 연출에 공감해야 하는 법인데, 이를 위해서는 ‘체험’으로 그러한 분위기를 느끼도록 하고 언제나 수요층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신속한 대응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는 기업이든 조직을 이끌어가는 사람이든 모두 해당되는 대목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무조건 투명한 메시지를 내보내라는 얘기는 아니다. 투명성은 당연히 중요한 덕목이지만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부정을 숨기는 경우가 아니라면 덜 매력적인 부분을 일부러 드러낼 필요는 없으니까 말이다. 위의 ‘연출’이라는 단어에서도 힌트를 얻을 수 있듯이, TV 예능 프로그램을 만드는 프로듀서나 출연진처럼, 혹은 조직을 이끄는 리더처럼 감정에 지나치게 솔직하기보다는 자신의 역할과 효용을 잘 알고 ‘최선의 결과물’을 위해 냉철한 프로답게 일하는 게 더 바람직한 경우가 많다.
미국의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은 인생을 가리켜 ‘내면의 진정한 자아가 상처받지 않도록 꾸며놓은 무대장치’라고 했다. 내면이 손상되지 않도록 외모든 행동이든 꾸며서 다른 이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도록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상호작용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내면의 진정한 자아라는 것은 스스로도 완벽히 알 수 없는 게 아닐까? 그러므로 진정성의 잣대를 자신에게든 타인에게든 섣부르게 휘둘러댈 게 아니라 자신에게 얼마나 다른 모습이 숨어 있는지 살펴보고, 새로운 역할이나 사명이 주어진다면 그에 맞는, 자아 속에 들어 있는 또 다른 면모를 개발하려는 자세야말로 진실된 인생에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지 않을까 싶다. 누군가 그걸 연기나 연출이라고 부른다 해도 말이다. 그리고 누군가 의혹 어린 시선을 던지면 제임스 길모어의 충고처럼 그냥 100% 진실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점 자체 정도는 ‘쿨~’하게 인정해버리면 어떨까. 불세출의 극작가 셰익스피어도 자신의 희곡에서 “세상은 무대이고, 누구나 배우일 뿐”이라는 대사를 남기지 않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