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인 컬렉션은 어떻게 도시의 문화적 자산이 되는가

조회수: 169
10월 21, 2026

글 고성연(방콕 현지 취재)

딥 방콕(Dib Bangkok)의 창조적 도전


1


지금, 현대미술 시장의 규모만을 잣대로 삼지 않고 새로운 움직임에 주목한다면 태국 방콕은 설렘이 감도는 도시 중 하나일 것이다. 찬란한 사원과 풍부한 문화유산을 자랑하고, 아피찻퐁 위라세타쿤과 리크리트 티라바니자처럼 국제 미술계에서 확고한 입지를 다진 작가들을 배출했지만, 동시대 미술을 지속적으로 소개하고 국제적 담론과 연결할 제도적 기반은 여전히 태국 미술계의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다. 그런 맥락에서 최근 태국 재계의 컬렉터들이 새로운 미술 공간을 열고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화재로 폐허가 된 옛 인쇄소를 비전형적인 예술 공간으로 바꾼 방콕 쿤스트할레부터 대규모 개인 컬렉션을 바탕으로 문을 연 딥 방콕(Dib Bangkok), 2027년 개관을 앞둔 디센트럴까지. 사적 자본에서 출발한 이 공간들은 방콕의 미술 생태계에 새 흐름이 일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중에서도 독특한 현대적 건축으로 개관 전부터 기대를 모은 딥 방콕은 2025년 12월 문을 연 뒤 빠르게 주목받고 있다. 지난 3월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세계 최고의 장소(World’s Greatest Places)’ 100곳에 이름을 올렸고, 최근에는 블랙핑크 리사의 신곡 ‘사와디카’ 뮤직비디오에 등장하기도 했다. 두 번째 전시가 열린 지난 9월 말, 현장에서 직접 마주한 딥 방콕은 단순한 미술관 이상의 의미를 지닌 공간으로 다가왔다. 지난해 가을 서울에서 설립자 푸랏 창 오사타누그라(Purat (Chang) Osathanugrah, b. 1993)와 나눈 대화에서 그가 강조한 ‘문화적, 창의적 부(cultural and creative wealth)’라는 개념도 새롭게 각인됐다. 사적인 컬렉션과 자본은 어떻게 한 도시, 나아가 한 국가의 문화적 자산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딥 방콕은 그 가능성을 실험하는 새로운 사례다.


2
3
4
5


방콕의 핵심 상업 지구 수쿰윗의 한 골목 안쪽. 검고 육중한 철문 안으로 들어서자 낯선 풍경이 펼쳐진다. 땅거미가 내려앉은 검은 하늘 아래 흰 원뿔형 건물이 모습을 드러내고, 그 주위로 저마다 다른 색과 무늬를 지닌 돌 구체들이 중정을 채운다. 딥 방콕의 첫인상을 강렬하게 각인하는 작품은 알리샤 크바데(Alicja Kwade)의 ‘Pars pro Toto’(2020). 폴란드 태생으로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작가는 조각과 설치를 통해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시간과 공간, 현실에 대한 인식에 질문을 던져왔다. 자연에서 가져온 돌을 구체로 가공한 이 작품에서도 서로 다른 물질과 형태는 낯선 질서를 만들어낸다. 중정 안쪽까지 걸어 들어가 뒤돌아보면, 커다란 돌 구체들은 마치 지상에 내려앉은 행성처럼 보인다.

1980년대 창고를 개조해 조성한 현대미술관 딥 방콕은 태국 출신의 세계적인 건축가 쿨라팟 얀트라사스트(Kulapat Yantrasast)가 이끄는 WHY 아키텍처(WHY Architecture)가 태국의 A49와 함께 설계했다. 지상 3층, 약 7,000㎡(약 2천1백20평) 규모의 미술관은 11개의 전시 공간을 갖추었다. 노출 콘크리트 기둥과 기존 창고의 흔적을 남긴 건물은 산업적 질감을 간직하면서도 빛과 여백을 세심하게 다듬은 공간으로 거듭났다. 쿨라팟은 건축가를 예술과 사람 사이의 ‘중매자’에 비유한다. 딥 방콕의 건축 역시 작품을 담는 그릇을 넘어 관객이 예술과 만나는 방식을 제안한다.

처음 이 프로젝트를 접했을 때만 해도 한 가문의 컬렉션을 공개하는 미술관을 상상했다. 그러나 직접 마주한 딥 방콕은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에 그치지 않았다. 작품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를 넘어, 작품들 사이에 어떤 관계를 만들고 그 관계를 다음 전시와 미래의 미술 생태계로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 딥 방콕은 이제 그 질문에 답하기 시작했다.



6
7
8
9
#아버지의 꿈을 넘어, 아들이 만든 기관
방콕 태생인 펫치 오사타누그라(Petch Osathanugrah, 1954~2023)는 단순한 기업가가 아니었다. 태국에서 널리 사랑받은 히트곡을 낸 뮤지션이자 예술을 사랑하는 컬렉터였다. 오랫동안 미술품을 수집하며 언젠가 자신의 컬렉션을 대중과 나눌 미술관을 꿈꿨다. 2백 명이 넘는 작가의 작품 1천여 점을 모았지만, 그가 바란 것은 작품을 소유하는 데서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컬렉션을 더 많은 사람과 나누고, 예술을 통해 새로운 만남이 이루어지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그 꿈이 잠시 멈칫할 수도 있었을 때, 아들 푸랏 창 오사타누그라(Purat (Chang) Osathanugrah, b. 1993)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미술관의 출발에는 한 컬렉터와 큐레이터의 오랜 인연도 자리한다. 2010년께, 데즈카 미와코(Miwako Tezuka)는 아시아 소사이어티 홍콩 센터의 전시를 준비하며 태국 작가 몽티엔 분마의 작품 ‘Lotus Sound’를 접했다. 5백 개의 종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을 계기로 펫치와 인연을 맺은 데즈카는 이후 그가 구상하던 미술관 프로젝트와도 연결됐다. 펫치가 세상을 떠난 뒤 창은 선친의 뜻을 잇기로 결심했다. 데즈카가 방콕으로 향하기로 마음을 굳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도 창의 말이었다. “아버지의 꿈을 이어가겠습니다. 꼭 해낼겁니다.” 컬렉션을 미술관으로 바꾸려는 의지와 이를 실현할 전문성이 만나면서, 아버지가 품었던 구상은 실제 기관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창이 바라는 딥 방콕의 미래는 한 가문의 이름을 알리는 데 있지 않다. 언젠가는 사람들이 이곳을 가족의 컬렉션에서 출발한 미술관이라는 사실보다 ‘방콕의 현대미술관’으로 기억했으면 한다. 뉴욕의 MoMA나 런던의 테이트 모던처럼 도시와 함께 떠올리는 기관이 되는 것이다. 개관 초기부터 국제적인 작품을 소개하는 동시에 태국 미술의 뿌리를 살피고, 새로운 작가와 관객이 만날 기회를 마련하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난 9월 말 딥 방콕에서 열린 샤넬 컬처 펀드 토크에서 창은 이제 자신들을 더 이상 개인 컬렉터라고만 부를 수 없다고 말했다. 미술관은 작품을 소장하고 전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소장품을 연구하고 새로운 전시를 기획하며 작가의 창작과 교류를 지원해야 한다는 뜻이다. 미술관의 공공성 역시 공적 자금을 지원받느냐의 문제만은 아니다. 사적으로 출발한 기관이 사회에 어떤 역할을 하고, 자신이 가진 자원을 누구와 나누느냐에 달려 있다. 데즈카 딥 방콕 관장이 이를 ‘시민적 책무’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국제적인 협력은 이러한 구상을 구체화하는 방식 중 하나다. 딥 방콕은 샤넬 컬처 펀드의 게이트웨이 커미션에서 동남아시아 최초의 기관 파트너로 선정됐고, 첫 커미션 작가로 태국의 나윈 누통을 초대했다. 올가을 막을 올려 내년 5월 3일까지 진행되는 〈기빙 라이프(Giving Life)〉에서 소개된 ‘Project 147’은 기존 컬렉션을 전시하는 데서 나아가 새로운 작품의 제작을 지원하고, 작가가 작업을 확장할 기회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펫치가 모은 작품에서 출발한 미술관은 이제 소장품을 보존하고 해석하는 동시에 새로운 창작을 뒷받침하는 기관으로 나아가고 있다.



10
11
#전시는 한 권의 긴 책, 그 안의 챕터들을 잇는 서사
데즈카 관장은 딥 방콕의 전시를 ‘한 권의 긴 책’에 비유했다. 개관전 〈(In)visible Presence〉가 미술관의 컬렉션과 태국 미술의 뿌리를 소개하는 첫 장이었다면, 두 번째 전시 〈기빙 라이프〉는 작품 간 대화를 이끌어내고 서로 다른 맥락을 연결하는 방식으로, 컬렉션의 또 다른 가능성을 탐색한다.

개관전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은 3층 전시 공간 대부분을 차지한, 태국 현대미술의 선구적 작가이지만 당시 국제 무대에는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몽티엔 분마의 작품이었다. 허브와 향, 종과 비어 있는 공간을 활용한 그의 설치 작업은 불교적 세계관과 치유의 감각을 관객이 몸으로 경험하게 한다. 같은 층에서 마주한 독일 거장 안젤름 키퍼의 대형 설치 작품은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과 조형 언어를 지닌 두 작가의 대화를 만들어냈다. 기억과 상실, 영성과 인간을 넘어서는 힘이라는 주제를 따라가다 보면 두 작가의 작품은 예상 밖의 접점을 드러낸다. 국제 미술계의 거장과 태국 현대미술의 선구자를 나란히 놓은 대담한 시도는 작품 사이의 공명을 통해 설득력을 얻었다.

〈기빙 라이프〉는 이러한 접근을 이어가며 태국과 해외 작가 33명의 작품 1백60여 점을 통해 예술의 움직임과 변형을 탐구한다. 알렉산더 칼더의 움직이는 조각을 주제적 중심축으로 삼아, 서로 다른 시대와 문화적 배경을 지닌 작품을 연결하고 주변 환경과 관객, 역사적 맥락에 따라 작품의 의미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살핀다. 특히 높은 층고를 자랑하는 채플에서는 천장에 매달린 칼더의 모빌이 거대한 수직 공간을 가로지르며 움직인다. 공기의 흐름에 따라 균형과 형태를 미묘하게 바꾸는 작품은 조각을 고정된 물체가 아닌 살아 있는 움직임으로 경험하게 한다. 작품을 독립된 대상으로 바라보는 대신 서로 연결해 그 관계 속에서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 전시의 핵심이다.

이번 전시에서 몽티엔의 작품은 아라야 라즈자름리안숙을 비롯한 다른 작가들의 작업과 만나 삶과 죽음, 신체와 기억을 둘러싼 질문을 새로운 맥락에서 던진다. 태국 작가 아라야는 죽은 이들의 몸과 살아 있는 사람의 시선을 마주하게 하는 영상 작업을 통해 삶과 죽음의 경계, 애도와 인간의 존엄을 탐구해왔다. 죽음을 추상적인 관념으로 다루는 대신 관객이 자신의 존재와 타인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그의 작업은 몽티엔의 치유와 영성, 키퍼의 작품이 환기하는 기억과 상실의 문제와도 맞닿는다.



1
2
#Artists are People Who Bring Matter to Life!
〈기빙 라이프〉 전시 기획을 맡은 젊은 큐레이터 아리아나 차이와라논(Ariana Chaivaranon)은 ‘예술가는 물질에 생명을 불어넣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전시장에 놓인 사물은 작가의 손을 거쳐 움직임을 얻고, 관객과 만나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 때로는 공기에 반응해 춤추고, 때로는 지친 기계의 반복적인 움직임 속에서 노동과 소진의 흔적을 드러낸다. 이 주제를 감각적으로 보여주는 작품 중 하나가 전시장 초입에서 만나는 폴 찬의 ‘Para in Penta’다. 공기의 흐름에 따라 부풀고 접히는 천 구조물은 마치 살아 있는 몸처럼 끊임없이 형태를 바꾼다. 찬은 주변 사람들의 몸짓에서 포착한 움직임을 작품에 담아낸다. 추상적 형태가 리듬을 얻으며 춤추듯 움직이는 모습은 ‘춤(La Danse)’을 떠올리게 한다. 인물의 몸짓으로 움직임의 에너지를 표현한 마티스와 공기와 천을 통해 공간 속에 움직임을 구현한 찬은 서로 다른 시대와 매체를 통해 움직임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레이철 윤(Rachel Youn)의 작업은 움직임을 몸과 기계, 노동과 소진의 문제로 확장한다. 한국계 미국인인 작가는 중고 마사지 기계와 아기용 그네, 인공 꽃처럼 익숙한 사물을 결합해 키네틱 조각을 만든다. 사람의 피로를 풀어주고 아이를 돌보기 위해 만든 기계는 사용된 뒤 버려졌지만, 작품 속에서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낡은 기계가 인공 꽃을 흔들며 반복적으로 작동하는 모습은 생명체의 몸짓을 닮았으면서도 어딘가 지치고 소진된 듯하다. 큐레이터 아리아나 차이와라논이 말하는, 물질에 생명을 부여하는 예술의 힘은 여기서 묘한 역설을 드러낸다. 생명을 닮은 움직임은 활력만이 아니라 끝없는 반복과 피로를 떠올리게 하지만, 기계들은 남아 있는 힘으로 춤을 추듯 움직인다. 마치 소진의 끝에서도 여전히 움직일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듯, 이 작품은 관객에게 ‘남아 있는 생명으로 춤추자’라는 초대를 건넨다.

알렉산더 칼더를 조명한 기획도 같은 시선에서 출발했다. 칼더는 조각에 움직임을 도입했을 뿐 아니라 춤과 공연에도 관심이 컸다. 그의 모빌은 공기의 흐름에 반응하며 공간에서 균형과 리듬을 바꾸고, 마치 안무를 펼치듯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낸다. 2026년은 칼더가 세상을 떠난 지 50주년이 되는 해지만, 이번 전시는 기념일에만 기대지 않았다. 큐레이터 팀은 칼더의 작품이 태국 미술과 맺어온 관계를 추적했다. 그의 ‘서커스’가 1975년 방콕의 비라시 현대미술연구소에서 선보였고, 당시 태국 작가들이 칼더의 작업을 접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기록도 남아 있다. 관련 아카이브를 따라가다 보면 1970년대 태국 미술이 추상과 설치, 퍼포먼스로 표현 영역을 넓히고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고민하던 흐름과도 만난다.

이처럼 딥 방콕의 전시는 국제적인 작품을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서로 다른 시대와 문화권의 작품을 연결해 새로운 의미를 발견한다. 특히 국제 미술의 흐름 속에서 태국 미술사의 숨겨진 연결 고리를 찾아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작품은 다른 작품과 만나고 새로운 맥락에 놓일 때 또 다른 이야기를 얻는다. 데즈카 관장이 말한 ‘한 권의 긴 책’은 그렇게 작품과 작품, 과거와 현재를 잇는 서사로 이어진다.



3
4
5
6


#컬렉션을 넘어, 도시의 문화적 자산으로
딥 방콕의 가능성을 만드는 것은 컬렉션만이 아니다. 미술관의 다음 단계를 구상하고 실행하는 창의적 추진력, 태국의 문화적 맥락을 공간으로 풀어낸 건축가 쿨라팟 얀트라사스트, 미술관의 운영과 방향을 이끄는 데즈카 미와코 관장, 새로운 전시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젊은 큐레이터의 기획력이 한곳에서 만난다. 여기에 샤넬 컬처 펀드와의 협력처럼 새로운 작품의 제작과 작가의 활동을 뒷받침하는 외부 파트너십도 더해진다. 물론 이것만으로 방콕의 문화적 르네상스를 단정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협력이 일회성 전시에 그치지 않고 교육과 연구, 창작 지원, 기관 간 교류로 이어질 수 있느냐다. 미술관이 작가에게 새로운 작업을 시도할 기회를 제공하고, 관객에게는 동시대 미술을 이해할 통로를 열며, 교육기관과 다른 문화 예술 공간을 연결한다면 그 역할은 소장품을 보여주는 데서 한층 넓어질 것이다.

쿨라팟은 태국이 다른 곳에서 무언가를 빌려오는 데 익숙하지만, 사실은 이미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보물은 우리 안에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보물을 발견하고 드러내는 데 그치지 않고, 더 많은 사람과 나누며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가는 일이다. 창이 말한 ‘문화적, 창의적 부’도 바로 그 지점에서 의미를 얻는다. 딥 방콕의 의미는 얼마나 많은 걸작을 소장하고 얼마나 국제적인 주목을 받느냐에만 있지 않을 것이다. 이곳에서 시작된 대화가 작가와 관객, 교육기관과 문화 예술 공간을 잇고, 도시 전체의 창작과 교류를 움직이는 하나의 ‘판’으로 확장될 수 있을까. 사적인 컬렉션이 함께 누리고 키워가는 문화적 부로 바뀌는 순간, 미술관은 건물을 넘어 도시의 미래를 만드는 힘이 될 수 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