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백합의 피렌체, 순백 대리석의 카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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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07, 2026

글 고성연(피렌체 현지 취재)

이탈리아 인문기행_1 토스카나 편_두 도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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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를 여러 차례 여행했지만, 정작 처음 밟아보는 토스카나의 땅이라 묘한 설렘이 앞섰다. 르네상스의 빛이 가장 눈부시게 머무는 피렌체(Firenze)에서 시작해 아푸아네 알프스의 흰 산을 품은 카라라(Carrara)로 향하는 짧지만 밀도 높은 여정. 이토록 다른 두 도시의 풍경이 한 여행길에서 이어진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피렌체가 붉은 백합을 상징으로 품은 꽃의 도시라면, 카라라는 순백의 대리석과 채석장의 산을 품은 돌의 도시다. 하나는 아름다움을 꽃피운 도시이고, 다른 하나는 그 아름다움을 가능하게 한 도시 가운데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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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두 도시를 이해하려면 오늘날 우리가 익숙하게 생각하는 ‘하나의 이탈리아’라는 틀을 잠시 내려놓아야 한다. 지금은 하나의 나라로 이어져 있지만, 이탈리아반도는 오랫동안 여러 정치 세력이 공존하고 경쟁하는 땅이었다. 중세를 거쳐 성장한 도시국가들의 경쟁은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찬란한 문화적 결실로 이어졌다. 그중에서도 피렌체는 상업과 금융으로 축적한 부를 예술과 건축으로 돌려놓으며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도시로 떠올랐다. 두오모의 붉은 돔 아래에서 브루넬레스키를 만나고, 거리와 미술관 곳곳에서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이름을 마주치는 도시 아닌가.


카라라 역시 그 작은 정치 세계 가운데 하나였다. 이웃 도시 마사(Massa)와 결합해 독자적 주권을 지닌 작은 나라로 존재했다. 훗날 ‘마사-카라라’라는 이름으로 불린 이 소국의 기반에는 산속에 풍부하게 묻혀 있던 대리석이 있었다. 카라라에서 돌은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었다. 도시를 먹여 살린 산업이었고, 세대를 이어온 기술이었으며, 사람들의 삶을 움직인 노동이었다. 카라라의 핏줄 같은 대리석은 피렌체를 비롯한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로 흘러갔고, 예술가들의 손에서 우리가 아는 미의 결정체로 거듭났다. 그래서 피렌체에서 카라라로 향하는 길은 단순히 유명 도시에서 낯선 도시로 이동하는 여정이 아니다. 완성된 아름다움에서 그 아름다움의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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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Firenze)
르네상스의 빛을 따라 걷다


산타 마리아 노벨라 기차역에 도착해 숨을 고르며 피스타치오 아이스크림을 한입 베어 물었다. 역을 빠져나오자 눈앞에 펼쳐진 피렌체 풍경은 의외로 평범했다. 관광객으로 붐비는 거리와 오래된 건물, 카페와 상점. 이탈리아의 이름난 도시를 여행하다 보면 익숙하게 마주치는 풍경이었다. 하지만 몇 걸음 옮기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거리를 따라 걷다 보니 19세기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건축가 주세페 멘고니가 설계한 건물 안에 자리한 중앙시장이 나타났다. 다시 오래된 건물의 모퉁이를 돌아 골목을 따라가자, 어느 순간 눈앞에 거대한 돔 하나가 솟아올랐다.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그러니까 두오모의 붉은 돔이었다. 조금 더 다가가자 장면은 더욱 선명해졌다. 전반적으로 테라코타 계열의 색조가 감도는 도시 풍경 속에서 돔을 중심으로 대성당의 몸체가 펼쳐지고, 한쪽에는 팔각형의 산 조반니 세례당이, 그 뒤로는 조토의 종탑이 시야에 들어오는데, 어찌 보면 하나의 커다란 조각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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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위에 피어난 도시의 자부심


스탕달의 말이 떠오를 만한 순간이다. “바로 저기가 단테,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살았던 곳이야! 이 고결한 도시, 중세의 여왕이여! 바로 이 도시에서 문예가 다시 부흥하지 않았는가.”


스탕달이 피렌체의 산타 크로체에서 경험한 강렬한 감동은 훗날 ‘스탕달 신드롬’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뛰어난 예술 작품이나 아름다운 건축물을 마주했을 때 강한 신체적, 정신적 반응을 일으키는 현상을 가리킨다. 신드롬까지는 아니어도, 피렌체의 거리를 걷다 보면 한 시대의 예술과 지성이 도시 곳곳에 새겨져 있음을 체감하게 된다.


물론 이 풍경은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졌을 리 없다. 특히 거대한 성당을 짓는 일은 단순히 신앙의 문제가 아니었다. 상업과 금융으로 부를 축적한 도시의 힘이 건축과 예술에 투입되었고, 길드와 유력 가문, 교회는 도시의 경쟁력을 건축물로 보여주려 했다. 성당을 세우고, 더 높은 종탑을 올리고, 더 아름다운 문을 만드는 일은 곧 도시의 자부심과 경쟁을 드러내는 일이었다.


완공되지 못한 채 오랫동안 도시의 숙제로 남아 있던 두오모의 돔에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도전했다. 당시 누구도 쉽게 해결하지 못했던 거대한 돔을 어떻게 올릴 것인가. 그 문제를 풀어낸 순간, 피렌체의 건축은 새로운 시대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리고 세례당에서는 로렌초 기베르티를 비롯한 예술가들의 경쟁이 펼쳐졌다. 특히 기베르티의 청동문은 조각을 건축의 장식에서 하나의 독립된 예술적 성취로 끌어올린 장면으로 남았다.
돌을 다루는 방식 또한 눈여겨볼 만하다. 세례당과 종탑을 장식한 흰색 카라라 대리석과 초록빛 프라토 대리석은 단순한 건축 재료가 아니라 건축의 색과 리듬을 만들어낸다. 흰색과 초록색의 기하학적 문양, 정교하게 다듬은 표면은 돌 자체를 시각적 언어로 바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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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피치에서 마주한 시간의 얼굴들
두오모를 뒤로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성당과 세례당, 종탑에서 본 예술의 경쟁은 이제 도시를 움직였던 또 다른 힘, 권력의 공간으로 이어진다. 바로 1565년 코시모 1세의 명으로 조르조 바사리가 만든 바사리 회랑. 베키오 궁전과 우피치를 잇고, 아르노강을 건너 피티 궁전까지 이어지는 이 회랑은 메디치 가문이 도시의 거리와 사람들 사이를 지나지 않고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든 통로였다. 권력자는 도시의 한복판을 걸어 다니면서도 군중과 섞이지 않을 수 있었다. 피렌체의 건축에는 미와 권력이 나란히 새겨져 있었다.


그 의미를 되새기다 보니 어느새 우피치에 닿았다. 우피치는 미술관이라기보다 황홀경에 가까웠다. 방에서 방으로 이어지는 전시실마다 시간이 더디 가기를 기도할 정도로, 눈길을 붙잡는 작품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거의 뛰어다니다시피 하는 바쁜 행보 속에도 어떤 작품은 절로 발걸음을 멈춰 세운다. 산드로 보티첼리의 ‘프리마베라’(1480년대 초)와 ‘비너스의 탄생’(1485년경) 같은 대작 앞에서는 얼어붙듯 서서 숨을 깊이 들이마시게 된다. 사실 책이나 화집, 엽서와 각종 인쇄물에서 너무나 익숙하게 보아온 그림들이다. 코트 안감에까지 새겨질 만큼 익숙한 이미지였다. 그런데 실제 원작 앞에 서니 경이로웠다. 화면의 크기와 색채, 인물의 표정과 디테일이 한꺼번에 다가왔다. 익숙했던 이미지가 비로소 하나의 작품으로 눈앞에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우피치의 복도를 따라가다 보면 벽 위쪽을 빼곡하게 채운 초상화들과 마주친다. ‘조비아나 연작’이라 불리는 이 초상화 컬렉션만 해도 5백 점이 넘는다. 수많은 얼굴 사이를 지나 다시 작품들을 바라보는데, 뜻밖의 영상 작품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고인이 된 현대미술의 거장 빌 비올라의 ‘Self Portrait – Submerged’(2013)였다. 물속에 잠긴 작가 자신의 모습을 담은 영상 자화상이다. 수백 년 전 초상화 사이에서 천천히 움직이는 한 인간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토록 위세를 누렸던 메디치도, 벽에 얼굴을 남긴 수많은 인물들도 문득 멀게만 느껴지지 않았다.


묘한 감정을 안은 채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르노강이 흐르고, 그 위로 베키오 다리가 놓여 있었다. 다시 도시 안쪽으로 걸음을 옮겨 시뇨리아 광장에 닿았다. 광장 한쪽에는 피렌체공화국의 정치적 중심이었던 베키오 궁전이 서 있고, 그 앞에 조각을 몰라도 익숙한 모습의 한 남성 전신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길거리를 스치는 모든 이들을 반겨주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복제품이다. 원작은 아카데미아 미술관으로 옮겨졌지만, 1504년 처음 세워졌던 자리에는 지금도 다비드가 남아 있다.


메디치 가문이 후원한 수많은 예술가 가운데 미켈란젤로만큼 피렌체의 역사와 예술을 깊이 새긴 인물도 드물다. 젊은 시절 메디치의 후원을 받으며 성장한 그는 훗날 피렌체를 대표하는 조각가가 되었고, 그의 ‘다비드’는 한 도시가 예술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려 했는지를 상징하는 작품이 되었다. 거대한 대리석 덩어리에서 인간의 몸을 끌어낸 이 조각은 그렇게 피렌체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그런데 그 돌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다비드를 바라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따라온다. 이 거대한 대리석은 대체 어디에서 왔을까. 그 답을 찾아가는 길이 바로 다음 여정, 카라라였다.



취재 협조_ENIT S.p.A-(이탈리아 관광청, www.enit.it / www.italia.it), 토스카나 관광청(www.vetrina.toscana.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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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라(Carrara)
백색 잔흔 너머의 아름다움


피렌체에서 보았던 건축과 예술의 융성은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개인의 부가 사회적으로 용인되고, 그것을 건축과 예술에 투자하는 일이 명예와 권위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받아들여지면서 도시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일감이 생겨났다. 피렌체의 건축가와 조각가는 이탈리아 각지에서 돌을 가져와 서로 다른 색과 질감을 조합했고, 그 돌들은 도시의 건축을 근사한 색채 팔레트로 만들었다. 두오모와 세례당 외벽을 장식한 흰색과 녹색, 분홍빛 돌은 피렌체 특유의 색채를 만들어냈고, 그 가운데 눈부신 흰색을 이루는 아푸안 대리석은 카라라를 비롯한 산지에서 왔다.

미켈란젤로 역시 그 시대가 만들어낸 풍요로운 후원의 수혜자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필요한 대리석을 찾아 카라라를 자주 오갔다. 피렌체 북서쪽에 위치한 카라라는 고대 로마 시절부터 유명했고, 오늘날에도 세계적으로 알려진 백색 대리석 산지다. 미켈란젤로를 비롯해 도나텔로, 베르니니, 카노바 등 수많은 조각가들의 작품에 이곳의 대리석을 사용했다.

그 명성은 오늘날에도 이어진다. 2022년 9월 문을 연 밀라노의 폰다치오네 루이지 로바티 미술관 입구에는 조각가 주세페 두크로가 제작한 설립자 루이지 로바티의 실물 크기 조각상이 서 있다. 티끌 하나 없이 깔끔한 순백의 조각 옆에는 ‘의사이자 기업가 루이지 로바티’, 그 아래에는 ‘카라라산 백색 대리석’이라고 적혀 있다. 르네상스의 미켈란젤로에서 오늘날의 두크로까지, 시대는 달라졌지만 여전히 사랑받고 있는 카라라의 흰 돌. 예술이 된 그 돌의 근원을 찾아, 이제 카라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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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산을 덮고 있는 날카로운 ‘대리석 캔버스’
한여름의 카라라는 몹시 뜨거웠다. 기차역에 내리자마자 곧바로 8인승 메르세데스 밴에 올라 아푸아네 알프스의 산속 채석장으로 향했다. 산길로 접어들어 모르타롤라(Mortarola)에 닿자 길가에 대리석 조각들이 놓여 있었다. 카라라 사설 대리석 철도의 기관사로 일하다가 독학으로 조각가가 된 마리오 델 사르토(Mario del Sarto, 1888~1955)의 작품이었다. 산에서 캐낸 거대한 돌을 싣고 내려오는 기관차를 몰던 그는 철도가 사라진 뒤 그 일을 그만두고, 마흔일곱의 나이에 조각을 시작했다. 평생 운반하던 대리석을 이제는 자신의 손으로 깎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이 일하며 오갔던 산길 주변에 남겨진 그의 작품 옆에는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예술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 자, 그 세계의 일원이 아니다.’


다시 밴에 올라 산속 더 깊이 들어갔다. 서쪽 토라노(Torano) 채석 분지에 들어서자, 얼마 지나지 않아 산 한쪽이 통째로 잘려나간 듯 거대한 백색 암벽과 층층이 파고든 절단면, 그 아래에서 움직이는 중장비가 나타났다. 카바 올모(Cava Olmo)였다. 하얀 대리석과 회색 암벽, 흙과 돌가루가 뒤섞인 색조는 마치 독일 신표현주의 거장 안젤름 키퍼의 캔버스를 산에 두른 것 같았다. 피렌체에서 본, 매끈하게 다듬은 대리석과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예술이 되기 전의 돌도 그 자체로 예술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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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나타, 돌과 바퀴, 그리고 식탁
방향을 바꾸어 아푸아네 알프스의 동쪽 계곡, 콜로나타(Colonnata)로 향했다. 마을의 작은 광장에 들어서자 대리석으로 만든 수레와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산에서 캐낸 돌을 싣고 내려오던 수레였다.


피렌체가 꽃과 번영의 이미지를 품은 ‘붉은 백합(Giglio Rosso)의 도시’라면, 카라라는 ‘돌과 바퀴의 도시’다. 카라라라는 이름의 어원에는 여러 설이 있지만, 고대 언어에서 돌을 뜻하는 말에서 비롯됐다는 설과 ‘Cararia’, 곧 수레가 다니는 곳에서 비롯됐다는 해석도 전해진다. 실제로 카라라의 문장에도 수레바퀴가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에는 ‘Fortitudo mea in rota’, 즉 ‘나의 힘은 바퀴에 있다’는 의미의 문구가 적혀 있다. 대리석을 산에서 끌어내리고 세상으로 실어 나르는 일이 이 도시의 힘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대리석은 또 다른 모습으로 일상에 들어와 있었다. 금강산도 식후경! 콜로나타의 대표 음식인 라르도 디 콜로나타(Lardo di Colonnata)는 돼지의 등 지방을 향신료와 함께 카라라산 대리석으로 만든 통인 콘카(conca)에 넣어 숙성한다. 산에서 캐낸 돌이 한편에서는 조각의 재료가 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음식을 익히는 그릇이 되는 것이다.


마을 골목의 벽에 붙어 있는 ‘돼지 포스터’는 라르도에 대한 자부심을 재미나게 담고 있다. 파르마와 시에나 출신이라는 두 돼지가 라르도를 만들어주는 알제(Alge)에게 같이 가자고 이야기하는 광고였다. 수레가 산에서 돌을 내려보내던 노동의 힘을 보여준다면, 라르도는 그 돌을 다시 사람들의 식탁으로 끌어들이는 생활의 힘을 보여주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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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티스크리티, 돌을 둘러싼 사람들의 삶
오후의 작렬하는 태양을 뒤로하고 콜로나타를 떠나 향한 곳은 중간 지대인 미셀리아(Miseglia). 산길을 따라가자 거대한 석조 아치교가 계곡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폰티 디 바라(Ponti di Vara)였다. 19세기 말 대리석을 실어 나르던 철도의 교량이다. 깊은 계곡을 가로지르는 석조 아치와 터널을 지나자, 산에서 캐낸 돌을 열차로 운반하던 시대의 모습이 눈앞에 겹쳐졌다. 철도는 1964년 폐선됐지만, 교량과 터널 등 그 흔적은 지금도 산길 곳곳에 남아 있다.


고대 로마 시대부터 대리석을 채굴해온 역사적인 채석장인 카바 벨지아(Cava Belgia)를 지나 판티스크리티(Fantiscritti) 일대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곳에서 뜻밖의 공간을 만났다. 판티스크리티의 카바 뮤제오(Cava Museo)는 대리석을 캐낸 채석장이 아니라, 이곳에서 일했던 채석 노동자들의 삶과 노동을 기억하는 야외 박물관이었다. 채석 도구와 장비는 물론이고, 여러 가족이 함께 살던 소박한 채석공의 집까지 재현해놓았다. 한 채석공의 아들인 월터 다네시(Walter Danesi)가 이곳의 기억을 보존하는 데 힘을 쏟았고, 덕분에 대리석을 세상에 내보내기까지 그 뒤에서 힘겹지만 꿋꿋하게 살아간 사람들의 삶이 이 공간에 남아 있다. 이 산을 오르내리며 일했던 이들에게 대리석은 예술의 재료이기 전에 생계를 걸어야 하는 삶의 터전이었다.


판티스크리티 분지는 미켈란젤로 예술의 가장 극적인 반전이 숨어 있는 곳이었다. 흔히 ‘다비드’를 미켈란젤로만의 창작물로 기억하지만, 그가 마주한 것은 처음부터 온전한 돌이 아니었다. 그보다 40년쯤 전 아고스티노 디 두초가 작업을 시작했고, 뒤이어 안토니오 로셀리노도 손을 댔지만 작업은 중단됐다. 거대한 대리석은 오랫동안 방치된 채 ‘일 지간테(Il Gigante)’, 곧 ‘거인’이라 불렸다. 스물여섯 살의 미켈란젤로는 이미 다른 조각가들의 손길이 남은, 작업하기 쉽지 않은 이 돌을 맡았다. 앞선 작업의 흔적과 한계를 피해가며 그는 새로운 돌을 덧붙이지 않고, 주어진 한 덩어리 안에서 다비드의 형상을 끌어냈다. 버려진 돌에 갇혀 있던 형상을 ‘해방’시킨 셈이다.


서쪽 계곡에서 만났던 노기관사 마리오 델 사르토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예술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 자, 그 세계의 일원이 아니다.’ 어쩌면 이 문장은 죽은 듯 놓여 있던 대리석 앞에서 기어이 발걸음을 멈추고 그 안에서 새로운 형상을 찾아낸 조각가들을 향한, 시대를 초월한 헌사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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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에서 도시로, 다시 사람의 손으로
채석장을 빠져나와 카라라 시내로 갔다. 카라라는 그저 명석 산지가 아니다. 로마 시대에 뿌리를 둔 카라라는 대리석을 다루는 오랜 기술과 예술의 전통을 이어온 도시로, 유서 깊은 도심에는 돌과 함께 살아온 시간과 자부심이 배어 있다. 구시가지에서 남서쪽으로 가면 바닷가 지역인 마리나 디 카라라가 펼쳐지고, 도시 뒤편으로는 아푸아네 알프스의 거친 산세와 채석장이 이어진다. 흰 대리석의 산과 초록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길은 사람들을 산으로 불러들이고, 산에서 내려온 돌은 도시의 건축과 예술, 디자인 속으로 들어간다.


도심 풍경은 어쩐지 정겹게 보였다. 알베리카 광장과 두오모, 미켈란젤로의 집을 지나며 만났던 흰 대리석은 단순한 건축 재료가 아니었다. 산에서 떼어낸 돌이 오랜 세월 도시의 표정을 만들고, 사람들의 삶과 함께 하나의 문화가 되어 있었다. 그 전통은 오늘날에도 이어진다. 2026년 여름, 카라라의 역사 지구에서는 제10회 화이트 카라라(White Carrara)가 열렸다. ‘Design Lives in the City’를 주제로 열린 올해 행사는 특정한 전시장이 아니라 역사 지구 곳곳을 무대로 삼아, 30여 명의 국제 디자이너와 지역 대리석 기업이 대리석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산에서 캐낸 대리석이 이제는 동시대의 디자인과 만나 도시의 풍경을 다시 만들고 있었다.


그날 밤은 아르누보 양식의 맨션을 개조한 마리나 디 카라라의 부티크 호텔로 대리석 채석장 투어도 운영하는 도리데 스위트에서 묵었다. 그리고 다음 날 다시 카라라 시내로 향해, 도시의 역사와 예술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미술 아카데미(Accademia di Belle Arti di Carrara)를 둘러봤다. 오래된 팔라초의 짙은 색 천장과 벽면의 프레스코, 대리석 기둥과 바닥 사이로 하얀 석고상들을 품은 이 고아한 공간은 1769년 설립된 이래 카라라의 조각 교육을 이어온 미술 아카데미다. 카노바와 로렌초 바르톨리니, 베르텔 토르발센 등의 석고 작품, 다양한 책과 스케치가 남아 있어, 대리석으로 완성되기 전의 시간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마지막 방문지는 실제 작업장인 카라라 조각가 협동조합(Cooperativa Scultori di Carrara). 세계적인 조각가들의 작품을 현실의 돌로 만들어온 이곳에는 대리석 원석과 석고 원형, 각종 기계와 도구가 자리하고 있었다. 작업 과정을 설명하던 한 전문가는 “우리는 여전히 다 손을 써서 합니다”라며 싱긋 웃었다. 조각가로 데뷔해도 될 듯한 솜씨였지만, 그는 그저 돌 만지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처럼 담담했다. 기계가 돌을 움직이고 다듬는 시대에도 마지막 형상에 온기를 불어넣는 일은 여전히 사람의 손이었다.



피렌체에서 사람이 완성한 미의 극치를 보았다면, 카라라에서는 그 아름다움이 만들어지는 세계가 여전히 숨 쉬고 있다. 산은 깎여나가고, 돌은 도시로 흘러가고, 사람의 손은 그 돌에 다시 형상을 새긴다. 그 과정이 남긴 절단면과 돌가루, 오래된 노동의 흔적까지도 카라라의 풍경이었다. 그런데도 애수 어린 카라라는 이상하리만큼 아름다웠다. 상처를 감추지 않는 산과 이를 보듬어주는 대자연, 그 산을 바라보며 살아온 사람들, 그리고 그 돌로 도시와 예술을 일구어온 시간이 한데 겹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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