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는 어떻게 럭셔리가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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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05, 2026

글 고성연(밀라노 현지 취재)

하이엔드 텍스타일 페어, 밀라노 우니카(Milano Unica) 43회


인간은 어떻게 재료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문화적 가치로 만들어내는가. 이탈리아는 그 답을 오랫동안 돌로 보여줘왔다. 카라라 대리석은 르네상스 조각의 미감을 만들었고, 트라버틴은 로마의 도시 풍경을 완성했으며, 피에트라 세레나는 피렌체 건축의 절제된 아름다움을 구축했다. 이곳에서 재료는 단순한 물성이 아니었다. 장인의 손길, 기술의 축적, 시간이 켜켜이 쌓인 문화적 언어였다. 오늘날 그 전통은 또 다른 재료인 텍스타일로 이어지고 있다. 섬유를 고르고, 실을 만들고, 색과 조직을 설계하고, 손끝에서 느껴지는 감각을 완성하는 과정에는 여러 세대에 걸쳐 축적된 제조 노하우와 끊임없는 혁신의 태도가 담긴다. 이탈리아 하이엔드 원단이 세계 럭셔리 패션 시장에서 기준점으로 자리 잡은 이유다. 그 흐름을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무대가 1년에 두 차례 열리는 텍스타일 페어 밀라노 우니카(Milano Unica)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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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섬유업계에는 이런 말이 있다. ‘진정한 시즌은 밀라노 우니카(Milano Unica)에서 시작된다.’
2005년 출범한 이 텍스타일 페어는 단순한 무역 박람회가 아니다. 이탈리아 섬유 기업가들이 직접 기획한 국제 플랫폼으로, 엄선한 프리미엄 밀(mill, 직물을 짜고 생산하는 전문 공장)의 무대다. 밀라노 우니카는 아이디어비엘라(Ideabiella), 아이디어코모(Ideacomo), 모다 인(Moda In), 셔츠 애비뉴(Shirt Avenue), 프라토트레이드(Pratotrade) 등 이탈리아 주요 섬유 전문 전시가 하나로 통합되며 새롭게 탄생했다. 이후 비엘라(Biella), 코모(Como), 프라토(Prato) 등 지역별 섬유 클러스터의 전문성과 장인 기술을 하나의 국제 무대로 연결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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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국제적 위상은 제43회 전시 규모에서도 확인된다. 지난 7월 7일부터 9일까지 3일 동안 총 7백37개 기업이 참가한 가운데, 아이디어비엘라, 모다 인, 셔츠 애비뉴 같은 주요 섹션에 6백4개 업체가 전시 부스로 참여했다. 특히 해외 바이어 비중은 처음으로 전체 방문객의 약 50%에 이르며, 밀라노 우니카가 이탈리아 섬유 산업을 넘어 글로벌 하이엔드 소재 시장을 연결하는 플랫폼으로 한층 더 성장했음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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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국제성은 아시아와의 연결에서도 드러난다. 밀라노 우니카는 일본관(Japan Observatory)과 한국관 (Korea Observatory)을 운영하며 각국 소재 산업의 강점을 소개하고 있다. 재팬 옵저버토리는 일본 섬유 산업의 정밀한 가공 기술과 소재 개발 역량을 보여주는 공간이었다. 비슈 울 같은 전통 기술을 기반으로 기능성과 새로운 소재 실험을 하며, 장인적 완성도와 기술적 진화를 함께 추구하는 일본 특유의 방향성이 돋보였다. 2015년부터 참여해온 코리아 옵저버토리는 기능성 섬유와 지속 가능 소재 분야에서 성장한 한국 기업들의 경쟁력을 보여주었다. 빠른 기술 적용력과 산업 대응력은 한국 섬유 산업의 특징이다. 밀라노 우니카가 보여준 것은 국가별 경쟁이 아니라 서로 다른 강점이 연결되는 새로운 소재 생태계였다. 이탈리아가 시간과 장인성을, 일본이 정밀함을, 한국이 기술과 속도를 보여주는 방식이다. 그리고 이러한 산업의 변화 속에서 자연스럽지만 쉽지 않은 질문이 떠오른다. “전통이라는 뿌리를 어떻게 미래의 혁신으로 연결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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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기술, 새로운 감각으로 진화하다
개막식 주제인 ‘뿌리에서 미래로: 섬유와 패션 혁신의 여정(From Roots to the Future: The Path of Innovation in Textiles and Fashion)’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모색하고자 했다. 오랜 제조 유산을 지닌 섬유 산업이 과거를 보존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축적된 기술과 새로운 혁신을 통해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가. 밀라노 우니카는 전통과 변화 사이의 균형을 산업의 중요한 과제로 제시했다. 그리고 전시장 안에서는 이 질문이 보다 동시대적인 언어로 표현됐다. 2027~28 F/W 시즌을 관통한 크리에이티브 콘셉트는 ‘MU IS PUNK!’였다.


여기서 펑크는 단순한 반항이 아니라, 익숙한 소재와 기술을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하는 창조적 태도다. 전통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유산을 새로운 감각으로 재해석하는 방식이다. ‘MU IS PUNK!’는 밀라노 우니카의 지속 가능성 트렌드 공간인 MU 트레덴체 소스테니빌리타(MU Tendenze Sostenibilità)를 중심으로 전개됐다. 이번 시즌 콘셉트는 잔 파올로 바르비에리(Gian Paolo Barbieri)의 사진전 와도 연결되며, 소재와 형태, 미학과 책임이 만나는 지점을 보여줬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여전히 가장 오래된 질문이 남는다. “좋은 소재란 무엇인가.” 그에 대한 답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 아이디어비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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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끝에서 완성되는 럭셔리, 비엘라에서 여전히 미래를 보다
이탈리아 럭셔리 울의 심장은 비엘라에 있다. 이탈리아 북서부 알프스 기슭에 자리한 비엘라는 풍부한 수자원과 수백 년간 축적된 방직 기술을 바탕으로 최고급 울 원단 산업을 발전시켜온 지역이다. 수트와 코트, 캐시미어 혼방 소재 등 세계 럭셔리 패션의 기반이 되는 원단이 이곳에서 제작된다. 밀라노 우니카에서 비엘라의 기술과 정체성을 보여주는 핵심 섹션이 아이디어비엘라다. 이곳은 이탈리아 최고급 울 원단 제조사가 모여 장인 기술과 소재 혁신을 선보이는 공간으로, 오래된 생산 노하우가 어떻게 ‘현재의 럭셔리’로 진화하는지 보여준다. 로로피아나(Loro Piana)는 캐시미어와 최고급 천연 섬유가 만들어내는 촉감의 가치를 보여줬고, 에르메네질도 제냐(Ermenegildo Zegna)는 클래식 울에 경량성과 기능성을 더한 현대적인 수트 소재의 방향을 제시했다. 비탈레 바르베리스 카노니코(Vitale Barberis Canonico)는 오랜 울 생산 기술을 기반으로 글로벌 수트 시장의 기준을 이어가고 있으며, 레다(Reda)는 지속 가능한 울 생산과 추적 가능한 공급망을 통해 전통 산업의 변화를 보여준다. 비엘라 섹션에서 보여준 메시지는 분명했다. 럭셔리는 더 이상 희귀한 원료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감각, 만드는 과정에 적용된 기술, 그리고 소재에 담긴 이야기가 새로운 가치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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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 가능성 너머, 소재의 새로운 기준
제43회 밀라노 우니카에서 지속 가능성은 단순한 유행어가 아니었다. 소재의 출발점부터 생산 과정, 공급망의 투명성까지 럭셔리 산업이 요구하는 새로운 기준으로 제시됐다. 전통적인 섬유 산업의 기술과 경험은 이제 환경적 책임이라는 새로운 기준과 만나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친환경 소재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소재가 만들어지고 소비되는 전 과정을 다시 설계하는 일이었다. 만테코(Manteco)는 이탈리아 섬유 산업이 순환 경제를 어떻게 럭셔리의 언어로 전환하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80년 이상 축적해온 울 가공 기술을 바탕으로, 사용된 섬유를 선별하고 재생해 새로운 고품질 원단으로 만드는 재활용 울 시스템을 발전시켜왔다. 대표 소재인 MWool(M울)은 단순히 폐기물을 줄이는 것을 넘어, 기존 섬유의 색과 촉감, 품질을 살려 새로운 소재 가치로 전환하는 기술을 보여준다. 재활용 섬유 프로젝트 CRP(Cardato Riciclato Pratese) 부스는 지속 가능성을 넘어 지역 산업의 가치를 증명하는 새로운 방식을 보여준다. 프라토를 중심으로 이어져온 재생 울 공급망을 유럽연합의 IGP(지리적 표시 보호) 인증 대상으로 인정받기 위한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프로세코(Prosecco), 모데나 발사믹 식초(Aceto Balsamico di Modena)처럼 특정 지역의 전통과 생산 방식을 보호하는 인증 체계를 섬유 산업에도 적용하려는 시도다. CRP 관계자는 “처음부터 지구를 구하기 위해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경제적인 이유였다”라고 설명했다. 폐섬유를 다시 활용하는 과정에서 비용 효율을 발견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물과 토지, 에너지 사용을 줄이는 지속 가능한 방식이라는 점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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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의 다음 장, 자연을 다시 설계하다
제43회 밀라노 우니카가 보여준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섬유 산업의 경계가 넓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미래의 소재는 더 이상 새로운 원료를 찾는 데 머물지 않는다. 바이오 기술, 기능성, 지속 가능한 생산 방식이 결합하며 럭셔리 텍스타일의 새로운 기준을 만들고 있다. 스파이버(Spiber)는 이러한 변화를 상징하는 기업이다. 일본 바이오 소재 기업인 스파이버는 단백질 기반 소재 브루드 프로틴(Brewed Protein™)을 개발하며 동물성 섬유 특유의 감성과 환경적 책임을 동시에 추구한다. 스파이버가 제시한 생애 주기 평가(LCA) 기준에 따르면, 캐시미어와 비교해 온실가스 배출은 75% 이상, 물 사용과 토지 사용은 각각 90% 이상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스파이버 관계자는 “소재의 감촉은 원사 방적 방식과 원단 설계에 따라 달라진다”라고 설명했다. 울렌(woolen) 방식으로는 공기를 머금은 캐시미어 같은 부드러운 감성을, 워스티드(worsted) 방식으로는 실크처럼 은은한 광택과 매끄러운 표면감을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브루드 프로틴은 골드윈(Goldwin), 더 노스 페이스(The North Face), 나나미카(nanamica) 등과 협업했으며, 버버리(Burberry)에도 소재를 공급하는 등 적용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에코펠(Ecopel)은 페이크 퍼(fake fur) 산업의 변화를 이끄는 대표적인 기업이다. 기존 퍼(fur)의 외관과 촉감을 유지하면서도 소재의 출발점을 바꾸는 데 집중해온 에코펠은 최근 재활용 폴리에스터를 넘어 100% 식물 기반(plant-based) 섬유를 사용한 제품을 선보이며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에코펠 관계자는 “가능할 경우 식물 기반 소재를 적용하는 것이 새로운 기준이자 혁신”이라고 설명했다. 에코펠은 한국 시장과의 협업 확대를 언급하며, 서울 동대문을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는 장소로 평가하기도 했다. ‘혁신’ 섹션에 참가한 효성(Hyosung)은 기능성과 지속 가능성을 결합한 소재 혁신의 방향을 보여줬다. 글로벌 퍼포먼스 섬유 브랜드 크레오라(CREORA)를 통해 고기능 원사 기술을 선보이는 동시에, 리젠(regen)을 통해 재활용 원료 기반의 지속 가능 소재 개발을 이어가며 미래 섬유 산업이 요구하는 성능과 책임의 균형을 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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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만든 럭셔리의 언어
밀라노 우니카의 마지막 메시지는 소재가 단순한 물성이 아니라 문화적 언어라는 점이었다. 전시장 한편에서 선보인 잔 파올로 바르비에리의 사진전 〈The Radical Elegance〉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패션의 본질은 화려한 장식보다 형태, 빛, 그리고 소재가 자아내는 감각에 있었다. 럭셔리는 더 이상 희귀한 원료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어떤 기술로 만들었는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그리고 손끝에서 어떤 경험을 전달하는지가 새로운 가치가 된다. 돌을 다루던 이탈리아 장인들이 시간과 기술을 통해 대리석에 생명을 불어넣었듯, 오늘날 텍스타일 산업 역시 실과 원단에 미래의 문화를 새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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