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 자유, 그리고 영국 신사의 품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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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06, 2022

글 김동현(비스포크 테일러, ‘트란퀼 하우스’ 대표, 영화 <스펜서> 의상 제작 참여)

오전 10시 산화철 안료로 붉게 물든 대로를 거닐며, 버킹엄 궁 앞에서 왕실의 기병대는 교대식을 치르고 있다. 더 몰(The Mall), 해군성 아치에서 트라팔가르 광장으로 이어지는 큰길이다. 화려한 행사 속 기병대는 영국군을 상징하는 붉은 제복(Redcoat)을 입고 있다.

붉은 제복, 견장에 달린 번쩍거리는 놋쇠 단추를 보며 수트의 모태가 된 영국의 군복을 생각한다. 현대사회의 유니폼이 된 이 옷은 제국을 지배했던 영국인들의 철저한 설계로 전파되었음을 말이다. 제국이 저물어가며 그들이 만든 전통과 옷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듯하지만 그 상징과 레토릭은 여전히 우리 주변에 존재한다. 영국 역사의 사건들에 주목해 양복의 변화를 알아본다.



지금으로부터 3백여 년 전인 1666년, 찰스 2세는 장식적이고 요란한 유럽의 궁정복 대신 베스트와 보디코트(재킷 개념), 바지로 이루어진 단순한 스리피스를 영국의 복장으로 공인한다. 흑사병과 대화재, 네덜란드와의 전쟁으로 나라 안팎이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재정적인 궁핍과 황폐해진 국토는 영국인들로 하여금 옷차림에 진실함과 소박함의 가치를 담게 했다. 득세한 청교도는 화려한 치장보다는 단정함과 간결함을 교리로 전파하고 옷으로 표상화했다. 칙칙하고 어두운 색은 그들의 근검을 뜻한다. 수트가 짙은 감색과 회색인 이유가 그 때문이다. 목의 깃과 소매로 살짝 보이는 흰색 셔츠는 그들의 위생과 인간관계의 의리, 진실성을 상징한다. 이 의복은 곧바로 군복과 제복에 적용되어 영국과 영국인이라는 시각적인 조형이 이때 완성된다. 양복을 공인한다는 찰스 2세의 칙령에는 복장으로서 국민의 정신을 통합하겠다는 저의가 깔려 있다. 수트는 빅토리아 시대(1837~1901)를 거쳐 틀을 갖춰나간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옷들은 차려 자세를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두 손을 양 허벅지에 밀착하고 가슴을 내밀고 등을 꼿꼿이 펴는 자세 위에 입혀진 옷이다. 가슴은 벌어지며 웅장해지고 어깨는 뒤로 젖혀진다. 등판의 길이는 줄어들며 어깨의 활동성은 배제된다. 등은 꼿꼿해지며 가슴부터 허리로 이어지는 선은 과감한 직선이 된다. 이 차려 자세는 빅토리아 시대의 인간 조형이었다. 차려 자세에서 자연스럽고 멋진 옷. 그것이 영국 양복이었다. 제식이라는 매뉴얼을 통해 인간 구성원을 구속하는 것이 군대이고 그 안에서 입는 옷이 군복이다. 빅토리아 시대는 영국의 치세다. 수많은 식민지와 다양한 인종과 지역적 가치를 아우르는 해가 지지 않는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모든 연방인과 영국인을 포용하는 하나의 군대적 국가를 만들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들의 옷은 착용자로 하여금 무의식적으로 국가와 왕에 대한 충성, 법과 질서에 대한 존경을 명령하게 되었다.


변화에 직면한 대영제국의 신사

군대처럼 옷에도 계급이 있다면 꼭대기에 있는 옷은 무엇일까. 영국 내에서 최상위 계층은 왕실이다. 왕족은 양복 스타일의 표준을 제시해왔으며 베스트 드레서로서 또는 스타일 가이드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고 있다. ‘왕관을 쓰고 싶다면 그 무게를 견뎌라.’ 그것은 옷 착용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엘리자베스의 대관식에서 그의 할머니인 테크의 메리는 이런 조언을 한다. “The two Elizabeths will frequently be in conflict with one another. But, the crown must win, must always win.” 왕관이 항상 이겨야 한다. 개인으로서의 엘리자베스와 군주로서의 엘리자베스가 항상 내적 갈등을 일으킬 테지만 항상 왕관을 쓴 엘리자베스가 이겨야 한다는 뜻이다. 인간 존재는 개인의 자아실현보다는 항상 국가와 시대의 번영을 위한 구성원으로서 존재했다. 데이비드나 윌리엄이나 조지는 양복을 입으면 모두 영국 신사로 불릴 수 있었다. 그들 개개인의 이름은 시대의 조형에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다. 대영제국이라는 큰 함선으로 나아가기 위해 개인은 사회의 부분으로 존재했고 양복은 이를 도왔다. 어제 런던 도심에서 본 양복 입은 신사는 오늘 에든버러에서 본 남자이며 내일 웨스트민스터로 출근할 공무원이다. 개성이 다른 개인들도 수트를 입으면 단 하나의 키워드인 ‘젠틀맨’, 즉 사회의 일원으로 귀결된다. 양복이라는 형태는 디자인과 이미지가 너무나 구태의연하게 느껴지고 변화를 거부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격동과 변화의 시대가 아닌 본질적으로 계급이 안정된 시대에 사회 구성원들이 하나의 질서로 생활의 안정을 누린다면 양복은 그 시대 최선의 패션이었다. 양복은 사회의 합의와 다음 세대로의 연속을 위해 의도적으로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그러나 인간은 감색과 잿빛의 모직 원단이라는 일관된 포장지로 감싸는 물건이 아니다. 개인은 감정이 있고 국가가 주문하는 명령에 다양한 의견을 표출할 수 있다. 영국 양복은 국가의 이미지를 하나의 상징인 군주로 귀결하고 통일된 이상을 제시하는 데는 탁월했지만 다양한 개성을 아우르는 데는 적합하지 않았다. 개인의 욕구가 너무나 커서 자아를 실현하고 책임과 직무를 벗어버리고자 했던 그 시대의 또 다른 영국인들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들은 ‘차려’를 강요하고 매뉴얼을 덕목으로 여기던 사회의 옷을 입지 못했다. 그리고 조상에게 물려받은 그 가치에 속박되기 싫어했다. 일생 동안 제식을 강요당하는 병정이 될 수 없었다. 그들은 새로운 옷을 위한 조형에 착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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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가치, 양복에 감정을 불어넣다

왕위에 오르기 전 영국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아폴로’, 에드워드 8세. 그는 사랑하는 여인의 도움 없이는 왕위를 계승할 수 없다는 세기의 연설을 끝으로 영국 왕실의 역사에서 사라졌다. 유년 시절 그는 아버지 조지 5세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감정을 중시하는 그의 사생활은 국왕인 아버지와 왕실 어른들에게 질타의 대상이 되곤 했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하나의 변하지 않는 질서 안에서 이루어지고 흘러간다는 것에 따분함을 느꼈다. 아버지 다음으로 체제를 수호해야 하는 왕이 되기에 그는 감정적으로 너무나 예민했다. 장남과 왕위 계승자로서 왕실과 국가가 끊임없이 에드워드에게 요구해온 책무, 소위 ‘영국인이라서 쓸 수 있는 왕관’이 그에게는 역설적으로 ‘무게’가 되어 짓누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전속 테일러에게 명령해 제복 모양을 갖추었지만 개인의 감정을 반영한 옷을 만들었다. 이를 통해 제복과 군복으로 대표되는 영국 양복에 부드러움이란 가치를 불어넣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사진 속 그는 여타 군주들과 달리 일관된 차려 자세가 아닌 다양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의 부드러운 양복 덕택이었을까. 감정과 사랑에 충실한 에드워드 8세의 옷은 모든 기존 양복에 획일화된 제국 국민이 아닌 멋과 자유의 영국 신사라는 새로운 가치를 불어넣었다.
1960년 런던, 토미 너터(Tommy Nutter)는 윈저 공과 같은 종류의 고민을 한다. 윈저 공이 왕자로서 왕실과 체제에 대한 반발을 옷으로 표현했다면 이 젊은이는 젊음을 무기로 보수화된 기존 질서에 대해 양복으로 일침을 가한다. 모던즈(moderns)를 주축으로 한 모즈 룩(Mod’s Look)의 출현이었다. 그는 기존 영국 양복에 텐트처럼 큰 어깨와 첨탑처럼 뾰족한 소매를 적용했다. 바지는 통이 크고 나팔바지처럼 펄럭거려 굽이 높은 구두에만 입을 수 있었다. 전통적인 양복을 뒤틀고 왜곡함으로써 기성세대에 대한 비판, 그리고 계급에 대한 풍자를 했다. 1960년대에 젊음의 아이콘으로 대표되는 비틀스, 엘턴 존, 믹 재거가 그의 고객이었고 기존 질서를 거부하는 모든 젊은이들이 그가 디자인한 옷을 애용했다. 그는 젊은 층을 테일러링 하우스로 끌어들였고 왕실과 귀족을 위해 복무하던 테일러들의 직업관을 한 명의 디자이너, 디렉터로 바꾸어놓았다. 새빌로의 너터스(Nutter’s)가 토미 너터의 양복을 이어가고 세계적으로는 톰 포드가 이 룩을 재해석해 수트를 만들고 있다.
영국 양복이 추구하는 전통적 개념은 시각의 통일성이며 제복을 만든 절대자에 대한 충성을 요구한다. 제국의 결속과 번영을 위해 설계된 옷인 셈이다.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동기를 지닌 자들로 하여금 동질성을 느끼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 그러나 윈저 공이 제시한 소프트 테일러링 또는 토미 너터가 고안한 모즈 룩 같은 또 다른 성격의 영국 양복은 기존 질서와 의복에 대한 반발로 탄생되었다. 모두 사회와 개인의 갈등을 절충하는 과정 속에서 꽃피운 새로운 인체의 조형이다. 양복에는 이처럼 역사의 흐름 속에서 정반합이라는 과정을 겪은 다양한 시대의 가치가 적절히 계승되었다. 우리는 어떤 가치를 좇으며 무슨 옷을 입게 될까.
“제국은 이미 무너지고 있지만 영연방은 여전히 강력한 실체인 것 같았다. 강대국이라는 옷을 여전히 용감하게 붙잡고 있는 영국은 세계 속에서 자신의 정당한 위치를 되찾을 것 같았다.” 전기 작가 필립 지글러(Philip Ziegler)의 말처럼 양복은 다시금 자신의 정당한 위치를 되찾을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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