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창조 계급, 한국 가구의 지평을 넓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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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06, 2013

에디터 고성연

홍대 앞 거리의 웬만한 카페에는 스칸디나비아풍, 젠 스타일, 빈티지 등 갖가지 원목 가구가 득세하고 있다. 유행은 지나가는 것이지만 사실 원목 가구는 트렌드와 상관없이 시간이 갈수록 정겨운 미덕을 지녔다. 대중적이면서도 미학적 오라와 양호한 질을 갖춘 한국 디자이너들의 젊은 가구 브랜드가 눈에 띈다. 작가주의 ‘아트 퍼니처’는 이미 꽤 있었지만, 이들은 소규모 공방이든, 공장과 협업으로 꾸리는 체제든 각기 다른 스타일과 비전을 갖고 ‘브랜드’를 지향한다. 한국 가구 디자인의 지평을 넓혀가는 젊은 크리에이터들의 활약이 반갑다.


국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유럽에서는 인지도가 꽤 높은 폴 켈리(Paul Kelley)라는 영국의 가구 디자이너가 있다.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월페이퍼 디자인 상을 받았고, 패션 디자이너 폴 스미스를 비롯해 유명 인사들을 고객으로 둔 이 인물은 디자이너가 아니라 ‘메이커(maker)’로 불리기를 원한다. 숙련된 목수의 자세와 수공예 장인의 실력을 발휘해 일일이 주문 제작 가구를 만들기에 이러한 호칭을 고집하겠지만, 확실히 그는 너도나도 ‘디자이너’임을 강조하는 요즘 세상에 튀는 면모를 지닌 것 같다. 일각에서는 그의 재능을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면서 효율적인 파트너 제조 시스템을 도입해 생산량을 늘리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해오기도 했다지만, 아직까지 그는 ‘메이커의 삶’을 고수하고 있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공장에서 찍어내는 획일화된 가구가 판을 치는 가운데 폴 켈리처럼 스스로의 손을 많이 사용하는 ‘메이커’들은 베테랑 목수의 솜씨와 디자이너의 감각이 어우러진 특유의 희소성 덕분에 더욱더 부각되고 있는 것이리라.
이러한 맥락에서 최근 국내 가구업계에서 안정된 직장을 찾는 대신 자신의 비전을 펼칠 수 있는 브랜드를 직접 만들어 키워나가려는 젊은 디자이너들이 입지를 다져나가고 있는 현상은 ‘메이킹(making)’에 대한 긍정적인 시선이 자라나고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저마다 방식의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지속 가능한’ 핸드메이드 가구를 고집하는 젊은 디자이너들이 이끄는 브랜드는 뭔가 허전한 구석이 많았던 국내 가구 디자인의 지평을 점차 넓히는 역할을 해내고 있다. 사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한국의 가구 시장은 해외의 명품 브랜드들과 독창성이 떨어지는 획일적인 디자인을 선보이는 중소 업체들 사이에서 참신한 디자인과 안정적인 품질, 마케팅 능력을 갖춘 ‘틈새 브랜드’를 거의 보유하지 못했다. 하지만 수년 새 기존과는 좀 다른 디자인 언어를 구사하며 따뜻한 감성이 묻어나는 ‘수제 가구’를 지향하는 젊은 디자이너 브랜드가 눈에 띄게 많아졌다. ‘작가주의’를 강조하는 것이 아닌 만큼 지나치게 부담스럽거나 반대중적이지도 않다. 얼마 전 서울 금호미술관에서 개최됐던전이나 코엑스에서 열렸던전에 대한 호응은 이러한 흐름을 잘 드러내는 증거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내년이면 반완제품을 파는 ‘DIY 가구의 제왕’ IKEA가 국내 시장에 입성할 예정이라 중소 업체들이 바싹 긴장하고 있는 가운데, 이들 신진 브랜드들은 ‘가구에 대한 대중의 관심 수준이 달라질 수 있다’며 오히려 환영하는 눈치다(물론 가격대도 다르다). 새 흐름을 이끄는 젊은 진영에는 1~2인이 운영하는 ‘공방’에 가까운 브랜드도 있고, ‘리빙 브랜드’를 지향하는 기업형 브랜드도 있으며 가구 카페를 함께 꾸려가는 프랜차이즈형 업체, 그리고 ‘인디 영화’를 연상케 하는 독특한 느낌의 목공소를 운영하는 개성파도 있다. 국내 가구업계의 크리에이티브 클래스로 떠오르고 있는 ‘4색’ 브랜드를 소개한다.

eine kleine 예쁜 가구 제작자가 아니라 건강한 삶을 지지하는 도우미가 되고 싶다
아이네 클라이네(ek-furniture.com)의 가구는 금호미술관의 전시회에도 선보였던 ‘수’놓고 옷 짓는 작업대를 보면 그 세심한 배려를 금방 느낄 수 있다. 스타일리스트 서영희 씨를 위한 이 작업대는 앉아서 작업하는 ‘수 작업’과 서서 하는 ‘옷 작업’이 섞여 있는 점을 고려해 일반 테이블보다 높은 750mm로 높이를 정하고 깊이도 920mm로 잡았다. 수 작업을 할 때 실패를 수납하기 위해 얕은 서랍을 달고, 반대편에는 옷 작업을 할 때 옷본을 넣을 수 있도록 길고 폭이 넓은 서랍을 달았다. ‘주문 제작’이기에 가능한 이 같은 ‘맞춤형’ 디자인은 실제로 가구를 쓰는 소비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을 바탕으로 세심하게 작업한 흔적이 역력히 보인다. 이렇게 고객의 사용 환경을 철저히 고민해 탄생시킨 가구는 아이네 클라이네가 바라듯 ‘삶의 도우미’, ‘삶의 동반자’처럼 쓰일 확률이 높기에 ‘지속 가능한 디자인’라는 지향점에도 맞닿을 수 있다. “건축하고 비슷해요. 저희는 일단 고객과 만나 요청 사항을 충분히 듣고 작업에 들어갑니다. 물론 표본으로 나와 있는 ‘오리지널 디자인’이 있긴 하지만 저희를 찾아오시는 분들은 대개 조금이라도 ‘수정’을 가한 가구를 원하시지요.” 우리에게는 모차트르의 세레나데로 더 익숙하게 알려졌지만 일본의 소설가 이사카 고타로의 단편소설 제목에서 따왔다는 ‘아이네 클라이네’ 퍼니처. 한국에서 주거환경학(연세대)을 공부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무사시노 목공대학원에 다닌 이상록 디자이너가 지은 브랜드명이다. 2009년 창업한 그는 2011년 문구 디자이너였던 신하루와 손을 잡고 2인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신하루 디자이너는 업계에서 꽤 유명한 디자인 문구 브랜드 mmmg의 창업 멤버이기도 하다. 주로 화이트 오크, 월넛 등 북미산 하드우드를 이용해 ‘건강한 삶을 지지하는 가구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 애써온 이들은 형태에서 디자이너로서의 개성을 드러내기보다는 ‘어떻게 쓰이느냐’, ‘주변과 어떻게 어우러지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일본 말에 ‘보통이지만 딱 좋은’이라는 표현이 있어요. 저희가 원하는 바를 압축한 구절 같아요.” 이상록 디자이너는 다행히 한국에서도 온 가족이 즐겁게 오래 사용할 수 있는 가구를 지향하는 그들의 철학을 알아주고 내실 있는 소규모 가구 브랜드를 원하는 층이 확대되고 있음을 실감한다고 했다. 원목 가구도 유행처럼 지나가는 소비 성향이 될 수 있다는 우려에 대해서는 이렇게 답했다. “원목 가구의 장점을 깊이 알기에는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아요. 원목을 사용하는 데 따른 장점, 관리법을 알아가면서 지금까지 몰랐던 재미를 느낄 수 있거든요. 예컨대 어린아이가 가구에 뭔가를 떨어뜨리거나 상처를 냈을 때 등 대처 방법을 터득할 상황이 생기는 것이죠. 그래서 저희도 고객과 공유할 접점을 세세하게 챙겨야겠다는 사명감을 갖게 됐습니다.”



매터앤매터 창업자
이석우(왼쪽), 송봉규
Matter & Matter 우아한 빈티지 업사이클링 가구,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를 꿈꾼다
매터앤매터(matterandmatter.com)의 테이블을 보면 천 조각을 약간씩 덧댄 ‘예술적인 패치워크’가 떠오른다. 인도네시아의 낡은 집, 고물이 된 화물 트럭과 어선 등을 해체해 얻은 오래된 티크 원목을 활용한다니, 그러한 느낌을 담을 수밖에 없을 듯하다. 세월의 숨결이 우아하게 묻어나는 매터앤매터의 빈티지 가구는 ‘업사이클링 디자인’의 진수를 보여준다. 업사이클링(upcycling)은 다 쓴 제품을 재활용하되, 리사이클링과 달리 원래보다 더 가치 있는 제품을 만드는 것이다. 100% 수작업으로 완성한다는 매터앤매터 제품은 ‘고재(古材)’라는 소재의 특성으로 투박한 듯하면서도 깊이가 있는 동시에 다리와 다리, 다리와 등판이 만나는 부분 등 디테일에서는 산업디자인 툴인 3D 모델링 작업을 적용해 예사롭지 않은 섬세함을 품고 있다. 이 같은 디테일 작업이 가능했던 건 공동 창업자이자 디자이너인 이석우, 송봉규 ‘듀오’가 삼성전자, 모토로라 같은 첨단 기술 기업에 몸담았던 이력 덕분일 것이다. 이들은 각자 회사에 다니던 시절, “창의적인 오브제를 즐겁게 만들어보자”며 함께 주말에 꾸리는 작업실을 냈다가 둘의 이름 이니셜을 딴 디자인 컨설팅업체 SWBK를 설립했고, 가구 브랜드인 매터앤매터도 운영하게 됐다(현재는 별도 법인). 대표 제품인 ‘레그 체어’와 같은 경우에는 카피 제품이 나돌아 애를 먹었을 정도로 인기를 끈 의자다. 책상 위에 연필이나 볼펜을 꽂을 수 있는 단풍나무 펜 트레이 ‘트로피컬 버드’는 ‘2013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에서 제품 디자인 상을 받기도 했다.
주로 기업을 상대로 한 SWBK의 컨설팅 일만 해도 눈이 팽팽 돌 정도로 바쁘지만 이들은 매터앤매터를 구심점으로 하는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를 키우려 한다. 이를 위해 가구 생산 기지를 한국으로 옮길 구상도 하고 있다. 또 올해부터 가구뿐만 아니라 세라믹, 패브릭 등 다양한 소재를 활용해 테이블웨어에 도전하겠다는 계획이다. 모든 걸 혼자 하겠다는 건 아니다. “저희는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언제나 마음이 열려 있어요. 리빙업계에서 강점을 지닌 타 업체들과 기꺼이 컬래버레이션할 생각입니다.” 실제로 최근엔 유기농 다이닝업체 인 시즌(In Season)과 ‘슬로푸드’를 선보이는 다이닝 행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카레 클린트 ‘3인방’
(왼쪽부터) 안오준, 정재엽, 탁의성
Kaare Klint 스칸디나비안 스타일의 가구 카페를 창안해낸 감각과 비즈니스 마인드
신혼부부들 사이에 이미 꽤 유명한 가구 브랜드 카레 클린트(www.kaareklint.co.kr)는 덴마크의 유명 건축가이자 가구 디자이너의 이름을 딴 것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스칸디나비아풍’으로 알려져 있다. 목조형 가구를 전공한 홍익대 동기(정재엽, 탁의성, 안오준) 3명이 뭉쳐 만든 이 브랜드는 ‘수제작’을 고집하지만 공방 개념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맞춤이 가능한 경우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기성화 제품’에 가까운 틀을 가지고 점진적으로 브랜드를 확장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재고를 떠안는 대리점 체제보다는 유통 마진을 줄이고 가격을 낮추는 방식을 바랬다. 그래서 대신 ‘가구 카페’라는 참신한 발상을 실천에 옮기게 됐다. 카레 클린트 가구로 인테리어 디자인을 살린 카페에서 커피도 팔고 가구도 판매하는 것이다. SNS나 블로그 등을 통한 신세대 마케팅 방식이 통했고, 마침 스칸디나비아 가구가 ‘대세’로 떠오르는 행운까지 겹쳐 진짜 사업을 하게 됐다. 창업한 이래 파죽지세로 달려온 터라 아직도 졸업을 못했다는 이 대학생 CEO들은 서울 청담동 본점의 쇼룸 겸 퍼니처 카페는 ‘직영 체제’로 꾸리는 한편 홍대점, 김해점, 그리고 최근 문을 연 수원점 등 지점은 프랜차이즈 형식으로 ‘점장’을 두고 운영한다. 월 매출 4억~5억원대로 꽤나 성공적이란다. “취직, 가구 작가, 아니면 스스로 원하는 걸 자유롭게 시도해보는 것, 이렇게 세 가지 길이 있었지만 저희는 ‘사업’에 ‘뜻’이 맞았어요. 사실 2010년에 시작했을 때만 해도 원목이 이렇게 뜰 줄은 몰랐지요. 처음에는 저희 디자인을 구현할 수 있는 공장을 찾으려 무턱대고 114에 물어보기도 했어요. 시행착오를 거쳐 현재의 파트너인 가구 장인을 만나 생산 체제를 안정적으로 꾸려가게 됐죠. 포장과 배송까지 안 해본 게 없어요.” 아직 앳된 티가 역력하지만 4년차 사업가답게 때때로 날카로운 비즈니스 마인드를 느낄 수 있는 면모가 보인다. 스웨덴을 모태로 한 IKEA가 내년이면 한국에 입성할 예정인데 이들은 그 파장을 어떻게 예상하고 있을까. “기본적으로는 가구에 대한 관심과 이해도를 높여줄 것이라고 생각해요. 저희는 저희가 잘할 수 있는 부분을 더 잘해야겠죠. 북유럽의 아이콘과 같은 자작나무, 그리고 물푸레 가구로 인기를 모은 이 업체는 이번에 소재의 스펙트럼을 확장해 ‘오크(oak) 시리즈’를 선보였다. 해리스 트위드, 쿠로키 데님 등 감각 있는 소재를 입힌 소파 시리즈 등 히트작을 내놓아 ‘협업’에 강한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지금은 내공이 대단한 알루미늄 전문 업체 등과 협업을 모색하고 있단다. “나무뿐만 아니라 금속을 적용한 다양한 시도를 해볼 생각입니다. 아직도 할 게 정말 많네요.” 지금까지와는 아예 다른 스타일을 갖춘 ‘2nd 라인’까지 구상 중이라니 역시 ‘거칠 것 없이’ 진취적인 20대다.



길종상가
(왼쪽부터)박길종, 김윤하, 류혜욱
길종상가 가구업계의 인디 영화 제작자들
소소한 물건을 주문형으로 제작해주는 목공소는 차고 넘친다. 하지만 젊은 크리에이터들이 신명 나게 작업한 흔적이 보이는, ‘컬트적’인 느낌마저 드는 작품 수준이 가능한 메이커는 드물다. 길종상가(bellroad.1px.kr)는 참 재미난 3인의 창작 그룹이다. 목공(가구)을 담당하는 박길종, 조명과 식물을 맡은 김윤하, 직물을 다루는 류혜욱이 속해 있다. 3명이 주문, 디자인, 제작, 운송 등 전 과정을 담당한다. 디자인 활동은 각자 자유롭게 하지만 일종의 ‘연대’를 맺은 셈이다. 창작을 할 때는시장에 가서 재료를 사기도 하고 고물이나 기증받은 기존 제품을 활용하기도 하는데, 어쨌거나 이렇게 해서 태어나는 ‘물건’들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나만의 것’이다. 화려하거나 세련되지는 않지만 편안하고 흥미로운 요소로 점철된 개성 만점 디자인이 특징이다. 빨강, 노랑, 파랑을 혼합하되, 한쪽은 둥그스름하게 다른 한쪽은 사각으로 만든 비정형의 선반, 의자의 상판이 한쪽으로 길게 돌출해 있어 의자도 되고 테이블도 되고 수납대도 되는 ‘만능 의자’, 돌돌 굴릴 수 있게 밑받침에 바퀴를 달고 뜨개실로 몸체를 얼기설기 감싼 화분 등이 피식 웃게 하는 ‘길종상가표’ 디자인이다. 원목을 고집하지는 않는다. 현대의 제한적인 거주환경에서 이동이 간편하고 기능적으로 변형도 가능한 소품과 가구를 독창적으로 적용하고 배합하는 공간을 창출하는 게 이들의 ‘이상’ 이다. 그래서 지난 6월에 구슬모아당구장(서울 한남동)에서 열린 이들의 전시 제목이 ‘네(내) 편한세상’이었을 것이다. 길종상가를 처음 시작한 박길종 씨는 “우리에게는 제시하고 싶은 라이프스타일이 있다”며 “누군가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 사람’이 확연히 드러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누가 즐거움이 쓸모없다고 했나?”라는 한 가구업계 거장의 말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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