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부산을 일부러 찾게 만들 정도로 기대와 설렘을 안겨주는 전시 콘텐츠가 있다. 부산시립미술관의 별관인 ‘이우환 공간’ 개관을 계기로 세계적인 현대미술가를 초청하는 기획전 시리즈 ‘이우환과 그 친구들’이다. 3년 전 물꼬를 튼 이 기획전의 세 번째 주인공은 유대계 프랑스인으로 당대의 거장인 크리스티앙 볼탕스키(Christian Boltanski). 그런데 그는 작품 선정부터 공간 구성, 전시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여러모로 관여하며 준비에 한창이던 지난해 7월 중순 돌연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현재 부산에서 진행 중인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4.4>전은 그가 살아 있을 때 참여한 마지막 전시이자 첫 유고전이 되어버렸다. 특정 작품은 만리타국일지라도 직접 가서 자신이 설치하기를 고집할 만큼 예술 에 진지하고 엄격했던 볼탕스키는 사적으로는 짓궂은 장난을 치기로 유명한, 흥미진진한 캐릭터였는데, 2015년 사진작가 히로시 스기모토와의 대화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어딘가에서 전시를 준비하다가 죽을 것 같아요.” 볼탕스키 생전에 부러운 인연의 끈을 지녔던 한 평론가가 그의 위대한 예술혼을 기리면서 추억을 더듬어봤다. /편집자 주
“당신은 나를 죽일지도 몰라요.” 파리 근교의 아틀리에에서 만난 크리스티앙 볼탕스키(Christian Boltanski, 1944-2021)가 필자에게 말한다. 그는 필자에게 그의 전시에 자주 등장하는 사진 작업을 설명하고 있었다. 사진에는 모범적인 가정의 일상이 담겨 있다. 가족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눈빛, 행복한 어머니의 미소, 즐거운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보면 관람자를 소름 돋게 하는데, 바로 사진 속 아버지들이 나치 장교라는 사실 때문이다. “아침에 (유대인) 아이들을 죽인 나치 장교가 저녁에는 그의 아이들을 사랑스럽게 품고 있다”고 볼탕스키는 설명한다. 이처럼 평범한 아버지가 파시스트 구조로 들어가면 상부의 명령에 순응하는 살인자가 된다. 우리라고 예외일까? 유대인 출신으로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던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주창한 개념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 상기된다. “내(볼탕스키)가 어렸을 때 고양이가 이웃집에 오줌을 누었다. 이웃은 좋은 사람이었지만, 고양이를 죽이지 않으면 고발하겠다고 경고했다. 당시 유대인은 반려동물을 키울 수 없었다. 사회구조가 그러하고, 권력을 가지게 되면, 당신은 나를 죽일 수도 있다. 고양이를 죽여야 했던 것처럼, 나 역시 아이를 죽이게 될 수도 있다”고 그는 말한다(“당신이 나를 죽일지도 몰라요”라는 말을 던지는 볼탕스키의 의도된 행동과 고양이 에피소드는 아마도 꽤 다수의 사람들이 접했을 일종의 퍼포먼스 같은 것이다). 미술계 ‘슈뢰딩거의 고양이’라 할 만큼, 양의적인 ‘볼탕스키의 고양이’다. 인터뷰를 할 때마다 매번 심장이 철렁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장례식에 참석하는 심정으로 그가 살아서 준비한 마지막 전시이자 첫 유고전을 관람하러 부산으로 향했다.
부산시립미술관이 자부하는 기획전 ‘이우환과 그 친구들’ 시리즈의 세 번째 전시로 앤터니 곰리(Antony Gormley), 빌 비올라(Bill Viola)에 이어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4.4>(2021.10.15~2022.3.27)를 개최하고 있다. 전시 제목 ‘4.4’는 그가 태어난 해인 1944년을 의미한다. 여기에 ‘우연히’ 한국에서 숫자 ‘4’가 ‘死(죽을 사)’와 발음이 같아 죽음을 상징하는 의미가 더해졌다(볼탕스키는 이를 알고는 되레 더 흥미로워했다고 한다).
볼탕스키는 ‘쇼아(Shoah)’, 다른 말로 하면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이 자행한 유대인 대학살 ‘홀로코스트’와 관련된 죽음의 작가로 알려져 있다. 죽음을 다루는 작가는 많지만, 각각 다른 죽음에 대해 말한다. 죽음의 계보를 쓴다고 할 정도로 거의 모든 종류의 죽음을 시각적으로 재현하는 데이미언 허스트의 죽음은 영국 위스키처럼 강하고 화려하나 식도 끝을 지남과 동시에 잊힌다. 반면 볼탕스키의 죽음은 오래된 프랑스 와인처럼 향기, 색깔, 맛이 심장에 배어들고, 때로는 심한 심리적 숙취를 유발한다. 예민한 관람객이라면, 전시장에 들어선 순간 죽음의 사자가 달라붙는 것같이 소름이 끼칠 것이다. 한시라도 빨리 죽음의 사자를 떨쳐내고 싶으면서도, 내면 깊은 곳의 타나토스(죽음의 충동)본능을 자극하기에 오히려 더 머물게 된다.
볼탕스키의 ‘죽음’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지만, 우리는 애써 ‘달’을 외면한다. 그의 창백한 달이 의미하는 것 중 하나는 ‘자유의지에 대한 환상(illusion of free will)(프란츠 M 부케티츠)’이며, 볼탕스키 식으로 말하면 ‘운(chance)’이다. 이러한 그의 의도를 잘 드러낸 전시로는 파리 그랑 팔레의 <모뉴멘타>(2010), 베니스 비엔날레 프랑스관 전시(2011) 등이 있다. 모뉴멘타 전시에서는 거대한 기중기가 무한 반복하며 옷을 허공에 높이 들어 올렸다가 떨어뜨린다. 이를 통해 자유의지가 허용되지 않는 삶의 기계적인 구조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베니스 비엔날레에서는 수많은 관람객이 재미 삼아 누르는 ‘버튼’에 의해 스크린에 괴물 같은 인물이 탄생하는 광경이 펼쳐졌다. 이 인물들은 어떤 의지도 표명하지 못하고 태어난다. 마찬가지로 아기들은 부모의 성교로 생겨난 완전한 우연의 산물로, 사회, 정치, DNA의 거대한 구조 안에서 수레바퀴처럼 돈다.
볼탕스키의 아틀리에에는 연극이 끝난 빈 무대처럼 전시를 위해 작업이 빠져나가고 휑한 가운데, 어디에서나 잘 보이는 작품 하나가 있었다. 가로가 긴 직사각형의 하얀 바탕에 검은색으로 ‘1907-1989’라고 적혀 있다. “저 작업은 무엇을 의미합니까?”라고 묻자, 그는 “나의 어머니(Marie-Elise Ilari-Gue´rin)입니다”라며 마치 실제 옆에 있는 자신의 어머니를 소개하듯 이야기했다. 사람의 삶은 여덟 자리 숫자와 ‘하이픈(–)’으로 압축된다. 불교의 생로병사(生老病死)에서 좀 더 함축적인 생(生)과 사(死)만 남고, 노(老)와 병(病)은 하이픈으로 축약된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두 사건이자 의례인 ‘생’과 ‘사’지만, 여기에 인간의 자유의지가 비집고 들어갈 여지는 없다. 그럼에도 예술가인 볼탕스키는 시시포스가 계속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밀어 올리듯(오디세이아, xi, 593~600) ‘개인적 신화’를 밀어 올리며 ‘자유의지의 환상’을 극복하고자 한다.
볼탕스키의 전시를 여러 번 접해본 미술 애호가들은 부산시립미술관 전시도 비슷할 것이라는 편견을 지니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는 같은 사진, 같은 금속 상자, 비슷한 전구, 옷, 등은 “재료일 뿐이기에, 어떻게 요리하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고 지적한다. 이번 전시도 비슷한 재료를 썼지만, 달랐다. 그는 ‘절친’ 이우환을 위해 그리고 한국인의 입맛을 고려해 최후의 만찬을 준비했다. ‘출발(De´part)’과 ‘도착(Arrive´e)’을 한글로 직접 도안한 것도 프랑스어로 봤을 때와 느낌이 많이 달랐다. 우선 형태적으로 프랑스어는 가로가 긴 직사각형인데, 한국어는 세로가 길다. 파리 퐁피두 센터에서의 ‘De´part’와 ‘Arrive´e’는 서커스 극장의 입구와 출구를 알리는 ‘안내문’의 느낌이 강했는데, 부산에서는 작품의 역할이 좀 더 강조되어 실제감이 약화됐다. ‘설국’과 ‘린네르’(Les Linges, Metal tables on wheels, cardboard, cotton cloth, staples, neon flexible LED, 2020) 같은 작품도 거의 비슷한 재료를 썼지만, 파리와 부산에서의 느낌이 아주 달랐다. ‘린네르’는 보자마자 팬데믹과 병상을 연상시키는 직접적인 표현이었다면, ‘설국’은 제목 때문인지 소설 <설국>의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묘사한 설경을 떠올리게 했고 허공에 쓰여진 LED는 마치 자유시 형태로 쓰인 유언 같은 느낌을 풍겼다.
DNA의 운송자로만 머물고 싶지 않았던 볼탕스키는 꾸준히 ‘개인적 신화’를 발전시켰다. 그는 실재와 허상, 삶과 예술의 경계선을 허물어뜨림으로써 생기는 모호함을 그러한 신화의 표현 양식으로 삼았다. 이번 부산시립미술관 전시에서는 그 정수를 확인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 이번 부산시립미술관 전시 제목 중 ‘4.4’는 그가 탄생한 해를 뜻하며, 전시 곳곳에서 볼탕스키가 유령처럼 출몰한다. 그의 얼굴 이미지가 전시 공간 여기저기 나타나며, 작가가 수년에 걸쳐 열중했던 영상 시리즈 ‘아니미타스(Animitas)’ 속 작품 배치는 그가 태어난 날의 별자리를 본떴다. 1987년 전설적인 큐레이터 하랄트 제만은 이 같은 그의 삶과 예술을 가리켜 ‘개인적 신화’라는, 아주 적절한 표현을 썼다. 이러한 신화적 속성은 그의 작업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사진이 어떠한 주관적 요소도 없이 객관적으로 재현하는 절대적 복제라고 여겼다. 바로 이러한 믿음 때문에 매스미디어를 통해 보고 듣는 이미지와 소리가 진리라고 믿었다. 볼탕스키는 일찍부터 ‘이미지의 순수성’을 믿지 않았으며, 그의 작업은 실재와 허상, 진리와 거짓 등 고의적인 혼동을 야기한다. 존재가 빠진 옷, 내용물이 없는 금속 상자 등에서 오히려 더 강한 존재의 이미지를 주술처럼 불러온다. 마치 요제프 보이스가 자신의 샤먼 신화를 만들었듯, 볼탕스키도 꾸준히 그의 개인적 신화를 확장해나갔고, 이제 완전히 그 신화 속으로 들어갔다.
2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4.4> 전시장(본관) 입구. 벽에 설치된 볼탕스키의 작품 ‘출발(De´part)’(2021)이 보인다. 130 X 220cm, 작가 소장.
3 프랑스 파리 근교의 말라코프에 있는 볼탕스키 아틀리에에서 미소 짓고 있는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화면 가운데 ‘1907-1989’는 그의 어머니의 출생 연도와 사망 연도다. 이미지 제공_심은록
4 ‘기념비(Monument, M002TER)’(1986), 300 X 127cm, 작가 소장. ‘어린 시절의 죽음’을 주제로 한 기념비 시리즈는 볼탕스키를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작품이다.
5 ‘심장(Cœur)’(2005), 가변 크기, 작가 소장. 이제는 실물로 볼 수 없게 된 볼탕스키 자신의 심장박동 소리가 사운드로 구현되고 있고 전구 하나는 심장박동 소리를 더 증폭시킨다.
6 ‘저장소: 카나다(Re´serve Canada)’(1988, 2021년 재제작), 가변 크기, 작가 소장. 유대인 학살과 관련된 작품으로, ‘카나다’는 억류된 유대인의 개인 소지품을 남겨둔 창고에 나치가 붙인 이름이다. 볼탕스키는 옷을 활용해 대형 설치 작품으로 진화시켰다. 이번 전시를 위해 부산 국제시장에서 중고 옷 2톤을 구해 제작했다.
7 1백65일의 전시 기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 ‘황혼(Cre´puscule)’(2015, 2021년 재제작), 가변 크기, 작가 소장. 별관인 ‘이우환 공간’에 있다.
8 ‘아니미타스(Animitas Chill)’(2014), 가변 크기, 작가 소장. 평균 해발 2,000m로 지구상에서 가장 건조한 지역인 칠레의 아타카마 사막을 배경으로 한 13시간짜리 영상 작품. 아우구스토 피노체크의 독재 아래 살해된 수천 명의 정치범이 이곳에 묻혀 있다고. 1, 2, 4~8 이미지 제공_부산시립미술관
9 ‘설국(Pays de Neige)'(2021), 가변 크기, 작가 소장. 생체 신호를 상징하는 천장의 LED 조명과 병상의 침대 시트를 연상시키는 흰색 천 무덤이 팬데믹 같은 재난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10 ‘출발(De´part)’과 대구를 이루는 설치 작품 ‘도착(Arrive´e)’이 보이는 전시장 모습. 9, 10 Photo by 고성연
[ART + CULTURE ’21-22 Winter SPECI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