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예술, 예술 속 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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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03, 2024

손바닥 안에 들어가는 모바일 스크린이든 멀티플렉스 영화관의 빵빵한 음향을 곁들인 대형 스크린이든 영화라는 매체는 우리가 처한 현실의 이슈를 다루고, 첨단 기술을 되도록 발빠르게 반영하려고 노력하면서 동시대에 경종을 울리는 사안은 물론 존재적론 사유의 물꼬를 터줄 수 있는 플랫폼이다. ‘제7의 예술’로 불리기도 하는 영화를 가리켜 누군가는 ‘인문학의 총아’라 했다. 하물며 당대의 흐름을 이끌어가는 예술가를 조명하는 영화는 그야말로 사유의 촉매제라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화면으로 그려낸 예술가의 모습이나 예술 자체가 창조적 여정의 면면을 다 담아낼 수는 없겠지만, 전시를 보거나 작업 세계를 파고들도록 하는 계기는 될 수 있다. 혹여 극장에서는 막을 내리더라도 디지털 세계에서는 손쉽게 영상에 접근할 수 있음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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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를 응시하는 카메라, 김창열
“내 그림 중 하나를 뒤집어놓았는데 물을 부었더니 셀 수 없이 많은 물방울들이 맺혔고 빛이 나면서 그림이 되었어. 그래서 나 자신에게 말했지. 이게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50여 년 동안 물방울 그림을 그려서 ‘물방울 작가’로 불리는 김창열 화가는 다큐멘터리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The Man Who Paints Water Drops)>(2022, 김오안·브리지트 부이요 감독)>에서 영화감독이자 자신의 둘째 아들이기도 한 김오안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김오안, 브리지트 부이요 감독이 공동 연출한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는 2021년 초에 작고한 김창열 화가를 다룬 섬세하고 날카로운 다큐멘터리 영화다. 그는 물방울이라는 매혹적인 모티브를 중심으로 작품 세계를 구축해 당대 가장 인정받는 예술가로 평가받았다. 그의 작품에는 전쟁의 상흔과 한국 역사에 대한 기억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김오안 감독은 자신의 육성으로 들려준 내레이션을 통해 아버지의 물방울을 이렇게 정의했다. “아버지는 전쟁의 외상을 평생 품고 살아왔다. 또 자신의 화실에서 마치 연금술사처럼 오랜 세월 연구한 끝에 그가 본 모든 흐르는 피를 마침내 순수한 물의 원천으로 변형하기까지 평생 일했다.”
김창열은 1929년 평안남도 맹산에서 태어나 네 살 때부터 할아버지에게 서예를 배웠다. 이후 남한으로 이주해 이쾌대 선생에게 처음으로 그림을 배웠다. 그의 유년기와 청년기는 일제강점기와 독립, 한국전쟁 등 격동의 한국 현대사와 맞물려 있다. 갤러리현대에서는 김창열 개인전 <영롱함을 넘어서>(4월 24일부터 6월 9일까지) 전시 연계 프로그램으로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 상영회(에무시네마)와 김오안 감독 온라인 GV를 진행했다. 김 감독은 온라인 GV를 통해 “촬영 과정에서 아버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묻고 싶었던 모든 것을 물어볼 수 있었다. 어릴 때 말수가 적었던 아버지는 여느 프랑스 아버지와 달랐다. 늘 침묵하는 아버지로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영화에는 어릴 적 아버지가 자주 들려주던 달마대사 이야기가 등장한다. 달마대사는 잠들지 않기 위해 자신의 눈꺼풀을 베어버렸다. 김창열도 스스로에게 매우 엄격한 사람이었다. 김오안은 아버지에게 묻는다. “영화 마지막 장면은 무엇으로 하는 게 좋을까요?” 아버지는 말한다. “맹… 산.” 맹산은 그가 평생을 그리워했던 고향이다. 물방울의 애처로운 기원이 마침내 드러난 클로징이었다.

천수림(미술 저널리스트) / 이미지 제공 갤러리현대, 영화사 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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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후, 사진은 나의 유일한 언어였다. 나는 생생하게 반짝이는 뉴욕에서 죽어가는 친구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포착했고, 있는 그대로의 내 얼굴을 솔직하게 담아냈다. 이제는 내 모든 명성을 걸고 거대 제약 회사에 맞서 싸운다. 생존과 투쟁의 기록이 담긴 나의 일기장을 당신에게 펼쳐 보인다.”

모든 아름다움을 위한 투쟁, 낸 골딘
기존 체제에 저항하는 하위문화가 트렌드의 정점으로 여겨지기도 했던 1990년대. 미국 사진작가 낸 골딘(Nan Goldin, 1953~)의 사진집 하나쯤 소장하고 있어야 ‘힙하다’고 생각했던 그 시절의 우리는 무력해질 때마다 밤새 거리를 쏘다니며 예술가들의 아지트를 찾거나 그들의 영화라도 봐야 무언가 해소되는 느낌을 받았다. 토드 헤인즈 감독의 영화 <벨벳언더그라운드>를 보고 조이 디비전의 노래를 듣고 낸 골딘의 사진을 들여다보는 식으로 당시의 언더그라운드 문화를 이해하고 흡수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뉴욕, 런던, 베를린, 파리 등을 배경으로 젠더에 대한 개념과 그녀 주변에 있는 언더그라운드 문화 예술계 인물들을 솔직하게 담아낸 낸 골딘의 사진은 마치 한 시대의 순수한 목격자처럼 진실에 가깝게 느껴졌다. 그녀는 사진을 통해 LGBT 커뮤니티, 에이즈, 약물중독 등 사회적 금기로 여겨진 이슈들을 직면하며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를 꾸준히 대변했다. 마쯔다와 헬무트 랭의 광고사진을 찍는 등의 활약을 하던 그녀는 마침내 1996년 미국 휘트니 미술관에서 회고전 <나는 당신들의 거울(I’ll Be Your Mirror)>을 개최하며 동시대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대열에 오르기 시작한다. 물론 지난해 가고시안 갤러리와 전속 계약을 맺고, ‘아트 리뷰 파워 100’ 1위에 선정되기도 하며 여전히 ‘현재진행형’ 아티스트로 활약하고 있다.
요즘 낸 골딘은 ‘예술가는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주류 사회에서 이탈한 문화와 집단, 수치스럽게 여겨지는 대상을 끌어안는 일을 넘어 그녀는 예술가로서의 ‘어떤 선언’을 세상에 던지고 있다. 2022년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거머쥔 다큐멘터리 영화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감독 로라 포이트러스)에서 작가는 직접 자신의 삶, 예술, 투쟁, 생존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며 타인의 고통에서 이익을 취하는 막강한 세력과 싸우는 치열한 과정을 보여준다. 중독성 강한 진통제 옥시콘틴의 피해자이기도 한 낸 골딘은 2017년 ‘P.A.I.N(처방 중독 즉각 개입)’이라는 단체를 설립해 너그러운 자선가처럼 활동하는 새클러가(약물중독으로 이익을 취한 제약 회사 퍼듀 파마의 오너 집안)를 고발한다.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그녀는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부터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이르기까지 새클러 집안의 기부금을 받은 세계 각지의 예술 기관을 찾아다니며 ‘새클러’라는 이름을 내리기 위한 시위를 벌인다. 로라 포이트러스 감독이 “인생에서 용감한 사람들을 많이 봤지만, 낸과 같은 사람은 결코 만난 적이 없다”고 말했듯 이 영화는 낸 골딘의 인생에 걸친 도전과 투쟁, 그리고 사진 작품 속으로 초대받은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그리고 다시 인생의 한가운데에서 치열하게 살아가야 함을 일깨워준다.

김수진(프리랜스 에디터, 디블렌트 CD) 이미지 제공 영화사 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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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사계절을 따라가봐요, 조경가 정영선
“바다는 바다대로, 산은 산대로, 숲은 숲대로, 도심은 도심대로…”, “겨울에 아름다워야 봄도 아름답고 여름도 아름다워”. 20세기 중반부터는 한국 개발사의 궤적과 거의 일치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전 국토를 종횡무진 활약하다가 어느덧 80대에 접어든 고령에도 여전히 호미를 들고 전국을 누비는 조경가 정영선(1941~). 그녀에게 헌정된 다큐멘터리 영화(<땅에 쓰는 시>) 속 독백은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서 할머니(윤여정 분)가 “사람도 꽃처럼 다시 돌아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라고 한 말을 떠올리게 한다(마치 그녀의 대사 사이로 아름다운 사계절의 풍경이 사라락 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꽃처럼 다시 피고 지고 할 순 없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자신의 철학과 미학적 역량을 나이테처럼 쌓아가는 위대한 예술가들이 있으니 조금 위로가 되는 듯하다. <땅에 쓰는 시>는 대한민국 1호 여성 조경가로 선유도공원을 비롯해 우리에게 수많은 ‘풍경의 미학’을 선물해온 정영선을 은은하게 조명한다. “어린 시절에 나를 본 사람들은 내가 시인이 되기를 바랐어.” 어릴 적부터 선친의 친구인 시인 박목월과 소중한 인연을 맺었던 그녀는 펜 대신 풀과 꽃, 흙에서 영감받아 땅에 시를 써 내려가는 삶의 여정을 걸어왔다. 과장을 보태자면 정영선의 작업이 곧 한국 조경의 역사라 해도 될 정도로 무수히 많은 산천의 정원과 수목원이 그녀의 손을 거쳤다. 국내 최초의 생태 공원 ‘여의도 샛강생태공원’(1997), 재활용 생태 공원 ‘선유도공원’(2002), 철길을 그대로 살리고 시민들이 직접 경작하는 동네 텃밭을 조성한 ‘경춘선 숲길’(2016) 등 대중에게 친숙하고도 눈부신 장소부터 ‘오설록 티 뮤지엄’(2011), ‘북촌 설화수의 집’(2021), ‘성수 디올’(2022) 등의 ‘핫 플레이스’까지 그녀의 작품을 영화에서도 만날 수 있다. 정영선의 혼이 담긴 공간을 바탕으로 수직과 수평으로 느리게 움직이는 카메라 워크와 사계절 앞마당에 핀 꽃에 이름을 달아주는 자막은 자연의 복원력을 더 기대하게 한다. <땅에 쓰는 시>를 연출한 정다운 감독은 <이타미 준의 바다>와 <위대한 계약: 파주, 책, 도시> 같은 다큐멘터리를 만든 이력이 있는데, 건축과 도시를 탐구하며 그 사이를 연결하는 ‘조경’의 중요성을 자연스레 깨달았다고 한다. “선유도공원, 양재천, 예술의전당 등 내 인생의 수많은 중요한 공간이 정영선 선생님의 손길로 완성되었다는 사실은 운명과도 같았다.”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 절제미를 간직한 우리 땅의 풍경과 역사를 어떻게 지키고 복원해야 할지 고민하게 하고, 사라져가는 사계절의 풍미를 매 순간 최선을 다해 느끼고 싶게 하는 정영선의 조경 미학은 다큐멘터리뿐만 아니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진행 중인 전시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에서 심도 깊게 들여다볼 수 있다(전시는 9월 22일까지).

김수진(프리랜스 에디터, 디블렌트 CD) / 이미지 제공 영화사 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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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를 떠올리게 하는 유이치 히라코

인간과 비인간을 분리된 개체로 인지하는 이분법적 시각은 우리 안에 오래도록 머물러왔다. 의식적이든 아니든 그처럼 인류의 우월성을 당연시하는 해묵은 태도에서 벗어나 미처 깨닫지 못했던 여러 세계에 눈뜨고 자연과의 ‘관계 회복’을 꾀한다는 논지의 콘텐츠는 사실 동시대의 첨예한 이슈를 아티스트의 관점과 스타일로 들여다보는 비엔날레 같은 미술제에서는 한동안 자주 다뤄졌다. 3년 전 가을, 부산 일광해변에서 펼쳐진 2021 바다미술제의 주제 역시 ‘인간과 비인간: 아상블라주(Non-/Human Assemblages)’였던 기억이 난다. 당시 미술제의 무대가 바다가 아니라 숲이었다면(어쩌면 그대로 바다였더라도) 일본 작가 유이치 히라코(b. 1982)의 설치 작업 역시 잘 어우러지는 풍경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의 고향은 신칸센(JR)으로 서쪽 끝으로 가야만 나오는 오카야마현인데, 짙디짙은 녹음이 겹겹이 드리운 울창한 숲이 펼쳐지는 자연미 가득한 지역이다. 어린 시절 5km 거리를 걸어서 등교하고 귀가할 때는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로 홀로 돌아오곤 했다는 유이치 히라코는 동식물이 생태계 순환의 구심임을 자연스럽게 체득했다. 획일적인 교과과정이 맞지 않아 런던(영국)으로 유학을 떠난 그는 대학 시절 도시의 녹지대와 인테리어용 식물까지 인간의 정신적 위안에 치우쳐 있다는 씁쓸한 현실을 주시하게 됐고, 이는 그의 작업 근간을 이루는 중심 주제로 발전했다. 선악의 잣대를 들이대거나 개척과 극복의 대상으로 대하지 않고 모든 자연을 ‘전체’로 바라보는 ‘심층 생태학’의 관점과도 연결된 태도라고 한다.

곱고 다채로운 색의 스펙트럼을 배경으로 귀염성 있는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그의 회화는 언뜻 보면 예쁘장한 판타지 동화를 닮은 듯도 하지만, 사실 생태계의 개체들이 상호작용하며 공존하는 관계성을 표현하는 비유와 상징으로 가득하다. 자연과 인간, 개발과 보존의 대립, 대항적 구도가 아니라 모두가 전체를 이루고, 저마다가 그 일부인 커다란 세계와 더불어 그 속에서 각자의 여정을 꾸려나가는 생명체에 대한 연민 같은 정서가 묻어나는 듯하다. 무 자르듯 하는 ‘편 가르기’의 의미가 시들해지는 세계관이다. 인간의 몸과 옷차림을 하고 있지만 얼굴 없이 사슴뿔 모양의 나뭇가지가 달린 ‘나무 머리’를 뒤집어쓴 ‘트리맨’이라는 작가의 상징적 캐릭터는 아마도 그런 이유에서 ‘하이브리드’ 성격을 갖추게 됐을 것이다. 그런데 지난해 말 서울 마곡동에 있는 스페이스K 서울에서 열린 유이치 히라코의 개인전을 접했기 때문일까. 올봄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2024)라는 영화를 보고는 이 알쏭달쏭한 매력의 ‘트리맨’ 캐릭터가 떠올랐다. 일본 산골 마을을 배경으로 캠핌장 개발을 목적으로 접근하려는 기업과 그곳에서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주민들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는 요즘 가장 주목받는 일본 영화감독의 작품답게 정적인 기조로 흘러가지만 점차 ‘속에서’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듯한 파동을 선사하는데, 대자연의 질서에 포함된 인간이란 존재와 선악의 실체에 대해 곱씹게 만든다. 마침 자신의 전시(갤러리바톤) 오프닝을 위해 서울을 찾은 유이치 히라코를 만나 물어보니 아직 이 영화를 보지는 못했다고 했지만(꼭 챙겨 보겠다고 했다) 그 역시 웃으며 “어느 편도 아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고성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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