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굴의 창조혼, 27년 만에 일본을 찾은 현대미술 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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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1, 2024

글 고성연

<Louise Bourgeois>_모리 미술관(Mori Art Museum)

지난가을 아트 위크 도쿄 기간에 일본의 거대한 메트로폴리스, 도쿄에서 수많은 행사가 펼쳐졌지만 아마도 방문객들 중 상당수는 롯폰기 힐스에 자리한 모리 미술관을 0순위로 찾았을 듯싶다. 단연코 ‘블록버스터’로 꼽히는 루이즈 부르주아(Louise Bourgeois) 전시가 열리고 있어서다(2024. 9. 25~2025. 1. 19). 9m가 넘는 높이의 커다란 청동 거미 조각으로 유명한 루이즈 부르주아의 70년에 걸친 위대한 창조 여정을 아우르는 회고전으로, 일본에서 27년 만에 다시 열리는 대형 전시다. 잘 알려졌듯 모리 미술관이 들어선 모리 타워 야외 공간에는 ‘마망(Maman)’이라는 청동 거미 작품 한 점이 특유의 오라를 뿜어내며 수호신처럼 자리하고 있다(2003년부터). 미술을 잘 모르는 행인들도 ‘거미 조각이 있는 광장’으로 기억할 정도로 상징적이다. 그러니 모리 미술관에서 열리는 루이즈 부르주아 회고전에 더욱 기대 섞인 관심이 쏠리는 것도 당연하다. 감상평을 돌려 말하자면, 단지 이 전시를 보러 도쿄행을 계획하는 이들에게 ‘엄지 척’을 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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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 갈 때마다 거의 빠짐없이 들르는 모리 미술관 으로 향하는 길에 자리한, 루이즈 부르주아(Louise Bourgeois, 1911~2010)의 대표작 ‘마망(Maman)’. 8개의 얇고 기다란 다리를 땅에 단단히 뻗은 채로 앉아 있는 이 거미 조각을 가까이에서 보면 배 속에 대리석으로 만든 32개의 알이 담긴 주머니를 품고 있다. 강렬하고도 우아한 카리스마로 광장을 지켜주는 듯한 작품은 실제로 작가에게 수호천사 같은 존재였던 어머니에게 부치는 ‘송가’다.


“어머니는 마치 거미처럼 천을 짜는 사람이었어요. 우리 가족은 태피스트리 복원 사업을 했고, 어머니는 작업장을 담당했습니다. 그리고 거미처럼 매우 영리했죠. 거미는 질병을 퍼뜨리는 모기를 잡아먹습니다. 그래서 거미들은 우리 어머니처럼 도움을 주고 지켜주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루이즈 부르주아가 스무 살 때 모친이 세상을 떠났고, 이는 그녀에게 크나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파리 태생으로 소르본 대학에서 수학을 공부하던 그녀가 미술을 시작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자신의 갤러리를 차려 일하다가 만난 남편과 함께 뉴욕으로 가서 여생을 보낸 부르주아는 프랑스에서의 유년 시절이 남긴 기억과 상처, 트라우마를 작업의 토대로 삼았다. 자신의 가정교사와 불륜 관계였던 아버지로 인한 것이었다. “내 작업은 고통과 상처를 정화하고 치유하는 투쟁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한 그녀는 평생을 예술 안에서 버텼다. 하나의 장르에 머무르지 않고 부드러운 직물 작업부터 드로잉, 회화, 조각, 퍼포먼스 등을 아우른 그녀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바느질과 직조를 예술의 영역으로 승화시켰다. 뒤늦게 주목받았지만 1982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여성 작가 최초로 회고전을 가졌고, 1999년에는 베니스 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을 받기도 했다.
필자는 사실 모리 미술관 전시가 큰 감동으로 다가올 것이라는 기대는 어느 정도 접고 있었다. 지난겨울, 오스트리아 빈에서 그녀의 초기작을 주로 선보인 전시 <Persistent Antagonism>을 보고는 그야말로 찡한 전율을 느껴서였다(좋은 전시는 많지만 감동을 느끼기는 쉽지 않다). ‘수미일관’의 예술 인생을 치열하게 살아간 그녀가 노년에 자신의 낡은 아파트에서 인터뷰하는 영상을 접하니, 그녀가 소속된 스위스 갤러리 하우저앤워스의 창업자들이 부러워지기까지 했다(처음에는 다소 까탈스럽고 예민한 모습이었지만 결국 만남을 거듭하며 인연을 맺게 됐다는 내용이 우르슬라 하우저의 책에 있다). 그리고 필자가 마누엘라 워스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한 말이 진심이었음을 새삼 느꼈다. “지난 세기의 가장 위대한 예술가 중 한 명인 동시에 어머니이자 아내, 그리고 심오한 사상가이자 굴하지 않는 창조력의 상징이었어요.” 그런데 모리 미술관의 회고전 <Louise Bourgeois: I have been to hell and back. And let me tell you, it was wonderful>은 다른 종류의 감동으로 다가왔다. 루이즈 부르주아의 커리어 전반에 걸친 1백여 점의 작품 수로 인한 규모의 미학도 있지만, 벽 전면을 감싸는 대형 스크린으로 내보내는 영상을 비롯해 여러 매체를 활용한 전시의 미학이 돋보였다. 그동안 루이즈 부르주아의 문장을 프로젝션 영상으로 선보여온 후배 작가이자 동시대 여성 작가 제니 홀저와의 협업도 반가웠다. ‘날 버리지 마세요(Do Not Abandon Me)’라는 제목의 전시 1부는 어머니의 죽음(1932)에서 기인했을 불안과 두려움을 다루고, 부친에 대한 거부감, 그의 사망(1951)으로 인한 심각한 우울과 극복을 위해 기울인 처절한 노력을 엿볼 수 있는 2부(전시 제목과 동명의 작업이 있는)로 이어지며, ‘예술은 제정신이라는 증거다(Art is a guaranty of sanity)’라는 문구로도 유명한 루이즈 부르주아의 예술 속 생존을 담은 마지막 3부로 끝을 맺는다. 전시의 직조도 훌륭했지만 작품 한 점도 허투루 보고 지나칠 게 없는 거장의 선물 같은 전시다. 모리 미술관을 이끄는 가타오카 마미(Mami Kataoka) 관장이 말했듯 ‘(그녀의 작품은) 인간의 근본적 감정을 건드리기에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어쩌면 애잔하기 그지없는 예술가의 투쟁이 그래도 위안으로 남는 이유는 전시 첫머리에 적힌 그녀의 글귀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My childhood has never lost its magic, it has never lost its mystery, and it has never lost its drama (내 어린 시절은 마법을 잃은 적도 없고, 미스터리를 잃은 적도 없으며, 드라마를 잃은 적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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