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색화의 전후, 맥락이 필요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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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6, 2016

글 강수미(미학·미술 비평,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단색화를 향한 국제 미술계의 뜨거운 구애가 일시적 유행으로 스쳐 지나가지 않게 하려면 조금 더 진지하게 작품과 제반 상황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나아가 이미 한국 미술의 지반이 된 원로들만이 아니라, 젊고 다양한 한국 작가들의 동시간대 미술과 거기 담긴 잠재력을 넓은 시야로 객관화하고 미술계의 다른 영역으로 네트워크시키는 일도 중요하다. 우선은 우리 안에서 단색화를 제대로 소화하는 데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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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잘된 비평은 충분히 나오지 않고 있고, 단색화 경향의 개별 작품에 대한 미학적·미술사적 가치에 대한
분석 작업조차 일천한 실정이다. 단색화 열풍이 불기 시작한 이후, 정말로 필요했고 여전히 우리가 마련하기 위해
무던히 애써야 하는 건 바로 그런 상대적 가치들의 생산이다.

2014년 가을부터 2016년 봄까지 대략 2년의 기간에 걸친 국내 미술계의 이슈는 ‘단색화’였다. 현재도 그 흐름은 꾸준히 어디선가 이어지고 있으니 과거형으로 말하면 무리일지 모른다. 다만 가장 뜨겁게 달아오른 때를 따지자면 그렇다는 얘기다. 이 시기에 갑자기 해외에서 불어닥친 한국 현대 추상회화를 향한 폭발적인 관심에 미술계 곳곳은 반신반의와 흥분, 의구심과 기대감이 뒤섞인 분위기로 물들었다.
이런 현상을 보고는 가장 기뻐했을 이들은 1970년대 한국 미술계의 젊은 실험 미술 세대로 등장해 1980년대까지 주류를 풍미했지만 1990년대 포스트모더니즘 바람, 2000년대 컨템퍼러리 아트의 득세에 밀려 자칫 잊히는 듯했던 원로 단색화 작가 당사자들일 것이다. 정상화, 박서보, 하종현, 이우환 등이 바로 그들이다. 고 권영우, 고 윤형근, 고 정창섭 등도 역시 여기에 속한다. 그러나 이런 작가들만이 아니라 큐레이터, 비평가, 미술사학자, 갤러리, 미술품 경매 회사, 국공립 미술관, 문화 예술 행정기관, 언론은 물론 금융계와 투자 자문 회사들까지 나서서 묘한 기류에 휩싸인 채 함께 들썩인 게 사실이다. 이런 상황을 되짚어볼 때 최근의 단색화 열풍을 비단 한국 추상미술의 미학적 가치를 두고 서구가 뒤늦게 보내는 순진무구한 찬사로만 보기는 어렵다. 또 ‘순수 미술(fine art)’과 ‘고급 예술(high art)’의 미학에 입각해 한 가지 안료로 그린 그림이 지닌, 아름다운 형상과 묘사적 내용 대신 비가시적 미와 철학적 가치를 음미한다는 엘리트 예술 애호가의 취미만도 아니다.
심정적 동조가 아니라 분석적 접근을 해야 할 때
한국 단색화의 국제 미술계 부상은 엄정한 아트 비즈니스 세계의 논리를 빼놓고는 파악할 수 없다. 단색화의 인기는 파리 페로탱 갤러리나 뉴욕 티나킴 갤러리, 블럼 & 포 갤러리 같은 유럽과 북미의 화랑들, 아트 바젤 같은 아트 페어, 홍콩 크리스티 같은 최대 경매사, 그리고 국제갤러리나 PKM갤러리 같은 국내 굴지의 화랑을 통해 본격화됐기 때문이다. 물론 단색화 열풍이 미술 시장의 상업적 전략으로 조성되었다거나 그 예술의 미학적 평가가 비즈니스로 왜곡됐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동시에 2000년대 초반까지 점차 한국 현대미술의 주요 무대에서 희미해지던 단색화를 글과 전시를 통해 재생시킨 비평가, 미술사학자, 전시 기획자의 노고를 무시하자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요 근래 단색화의 국내외적 흥행을 우연의 일치나 뒤늦게 날아든 행운, 오로지 학술적이고 문화적인 차원의 성과, 아시아 미술을 향한 이해타산 없는 글로벌 미술계의 짝사랑 같은 것으로 볼 수는 없다는 의미다. 그런데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렇게 보고 싶어 하고 그리 엇비슷하게 믿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예컨대 ‘한국의 단색화 작품이 정말 좋으니까 외국인들이 그렇게 열광하는 거 아냐’라거나 ‘단색화에는 서구의 거창하고 과시적인 미술에는 없는 동양의 담백함과 자연미가 있지’ 같은 소박한 해석 말이다. 혹은 ‘2015년 11월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박서보 작가의 1975년 작품이 10억원 넘는 가격에 낙찰됐는데, 그게 다 40여 년간 묻혀 있던 작품의 진가를 이제야 사람들이 알아봐서’라는 식으로. 그런 심정적 동조로 큰일이야 나겠는가마는.

단색화의 상대적 힘
“실제로 단색화 작품을 보면 ‘이게 왜?’라는 반응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작년 한 공영방송사 기자는 해외에서 큰 인기를 모으고 있다며 단색화를 보도하는 가운데 이렇게 말했다. 단색화 작품을 보는 것만으로는 그 예술성을 체감하기 힘들다는 뜻. 또 “그것이 왜 해외에서 그리 비싸게 팔리는지, 왜 한국 미술의 블루칩이 된 건지, 솔직히 모르겠다”라고 했다. 사실 이 기자 말고도 대부분 사람들은 현실과는 거리가 먼 초고가 작품 판매로 뉴스를 장식한 ‘단색화’라는 그림에 이 말 이상도 이하도 아닌 반응을 보이며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단색화가 평가절하되던 시기에 조금은 냉소적인 의미로 ‘벽지 그림’이라 불렸던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 추상회화 작품은 무미건조해 보이기 때문이다. 볼거리도 별로 없고 만든 품새나 기교도 예술적으로 그리 탁월하지 않게 여겨질 수 있다. 그럼에도 외국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하니, 게다가 미술 시장에서 놀라운 가격에 팔려나가고 일부는 품귀 현상까지 빚어진다니 호기심이 날로 커질 것이다.
반면 우리 자신을 단색화 시장의 구경꾼이 아니라 단색화 향유의 의미 생산자로 옮겨보면 앞서 기자의 “이게 왜?”라는 질문에 다른 답을 제시할 수 있다. 단색화가 서구의 현대미술과 연결되는 지점과 동시에 그와 예술적으로 차별화하는 지점 말이다. 우선 이제는 많이들 알겠지만 ‘단색화’는 미국, 프랑스, 독일 등에서 1910~1950년대에 유행했던 ‘모노크롬 회화(monochrome painting)’ 또는 ‘색면 회화(color-field painting)’, 그리고 1960년대 ‘미니멀리즘(minimalism)’과 자주 비교된다. 그만큼 눈으로 보기에 유사한 면이 있다. 색채를 단순하게 쓰고, 형상을 묘사하는 대신 점, 선, 면, 컬러, 구조 같은 조형의 기본 요소를 작품의 최소 형식이자 내용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현대 회화의 조형적 탐구, 특히 팝아트나 민중미술처럼 대중문화 또는 현실의 삶과 직접 얽히지 않고 회화 내부의 실험을 고수했다는 점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박서보, 이우환을 비롯해 현재 단색화 그룹으로 분류되는 여러 원로 작가들은 서구 추상회화와 자신들의 미술은 태생적으로 다르고, 미학적 결 또한 매우 독자적이라고 강조한다. 가령 형이상학적 논리보다는 자연 친화적 정신, 미술사의 이즘(ism)보다는 개인의 내면 탐구, 미학 이념의 성취·달성보다는 마음 비움과 정신 수양 등이라는 차원에서 완전히 다르다고 역설해온 것이다.

맥락 있게, 의미를 갖고
여기서 국제 미술의 지형학 안에서 자리를 잡으려는 단색화의 전략이 보인다. 이는 예술의 상대성 가치에 관한 문제다. 그리고 이때 가치란 우리가 믿고 싶어 하는 것처럼 절대적이고 본질적인 게 아니다. 오히려 비교와 차별화를 통해 만드는 것이고, 상대적 의미의 관계 속에서 형성해나가는 것이다. 세계의 지역들이 수평적으로 공존하며 서로 다른 문화와 자본을 교환하는 글로벌 시대, 한국의 단색화가 국제 미술 시장에서 주목받은 배경도 거기 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점은 단색화가 미술품 경매장의 반짝 아이템으로 떴다 지는 것을 막으려면 그 상대성의 가치를 맥락 있고 설득력 있게 창안하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2014년 하반기, 국제 미술계에서 단색화의 흥행 조짐이 뚜렷해질 즈음 국내 미술 전문가들 사이에서 단색화에 관한 심도 깊고 풍성한 이론적 접근, 비평과 담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진 이유다.
현재까지 결과를 볼 때 상업 화랑이 주재하는 국내외 단색화 전시는 매우 빈번히, 그리고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장소에서 규모 있게 열리고 있다. 또 김태호, 김용익 등 소위 ‘단색화 2세대’ 혹은 ‘포스트 단색화’라 불리는 중견 작가들이 단색화 열풍의 새로운 수혜자이자 ‘확장 버전’으로 등장하면서 그 세력이 점차 넓고 여러 갈래로 확대되는 추세다. 각종 아트 페어와 옥션에서의 판매도 꾸준히 호황을 누리는 모양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여전히 잘된 비평은 충분히 나오지 않고 있고, 단색화 경향의 개별 작품에 대한 미학적·미술사적 가치에 대한 분석 작업조차 일천한 실정이다. 담론으로 정교하고 학술적으로 진지한 비평과 분석만 부족하다는 말이 아니다. ‘그저 좋다’거나 ‘세계 미술 시장을 홀렸다’라거나 ‘단색화발 K-아트 폭격’ 같은 일차원적 논평, 선정적 언어를 넘어설 단계라는 얘기다. 여러 지역과 계층과 삶의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미술을 받아들이고 나아가 스스로가 새로운 가치를 매길 수 있는 여러 종류의 이야기가 넘쳐흘러야 바람직할 것이다. 단색화 열풍이 불기 시작한 이후, 정말로 필요했고 여전히 우리가 마련하기 위해 무던히 애써야 하는 건 바로 그런 상대적 가치들의 생산이다. 더불어 그렇게 생산된 가치와 의미가 맥락 있게 퍼져나가는 일이다. 하지만 현재 그 기대는 내부에서부터 무너지고 있다.

단색화 이후의 경로
서구 미술 전문가에게 단색화 작가 중 국제 미술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한국 추상미술을 상징하는 아티스트를 딱 한 명 꼽으라면 많은 이들이 이우환을 지목할 것이다. 그는 일본의 전위미술 운동인 모노하(ものは)를 비평하며 두각을 나타내 그곳 미술계를 기반으로 성장했다. 미술가임에도 여느 문인 못지않은 뛰어난 글 솜씨로 자신의 작품에 ‘점으로부터’ 같은 시적인 제목을 붙이고 <만남을 찾아서>, <여백의 예술> 등 예술서를 내놓으며 국내외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리고 원로에 접어든 2000년대만 해도 2011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회고전, 2014년 파리 베르사유 궁 초대전에 이르기까지 최고의 경력이 될 만한 국제전을 이어왔다. 이런 이력과 내공이 있었기에 이우환이 서구 미술계에서 단색화 열풍을 이끌어낸 단초가 된 인물이자 대표 작가로 공인돼온 것이다. 하지만 지난 6월 경찰이 ‘이우환의 1970년대 단색화’라며 미술 시장에서 유통된 13점을 ‘위조범에 의한 위작’이라고 판정했지만, 정작 작가는 “모두 진짜”라며 진실 공방까지 벌인 사건은 작가 개인만이 아니라 한국 미술계의 큰 추문이자 오점이 되고 있다. 이 위작 사건의 밑바탕에는 단색화가 미술 시장의 호재로 등장하면서 미술의 순수성은 웃기는 얘기가 되고, 돈에 혈안이 된 사람들이 우글거리게 된 이 바닥의 동물성이 깔려 있다. 결국 돈이 문제다. 도박판이나 투기판과 크게 다르지 않게 작동하는 거래, 탐욕적 이윤 추구가 단색화 화가들이 말하는 자연미, 비움과 지움의 미학이라는 가치를 땅에 떨어뜨리고 정통으로 배신하고 있는 것이다.
짝사랑해온 상대방이 불현듯 잘해줄 때 느끼는 미심쩍고 자신 없는 마음처럼, 처음에 이곳 미술인들은 한국의 단색화를 향해 유럽과 미국에서 보내오는 러브콜을 반신반의했다. 그러고는 “단색화를 정말 잘 알까?”, “도대체 단색화의 어디가 흥미를 끈 것일까?”, “단색화의 매력을 어떻게 어필해야 저들의 관심이 일시적인 데서 끝나지 않을까?”, “잘 팔기 위해서 미술 시장만이 아니라 한국의 미술 비평, 한국의 미술사, 나아가 한국 정부는 무엇을 해야 하지?” 같은 물음에 다들 달아올랐다. 예컨대 예상치도 않게 싸이의 ‘강남스타일’ 을 비롯한 K-팝이 전 세계 남녀노소를 열광시키자 어리둥절해하며 진의를 의심했던 것처럼 한국 미술계는 단색화 열풍 앞에서 흔들렸다. 그리고 서구의 ‘단색화 애호’가 잠깐 스치는 바람이 아니기를 바라고 있다. 단색화 열풍 이후의 과제가 현재의 불씨를 한국 현대미술의 다양한 작가와 작품으로 번지게 하는 것이라는 데는 누구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는 비평도 담론도 정지 상태고, 논란과 불안감은 진행형이다. 맥락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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