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비엔날레가 우리 삶에 선사할 수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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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9, 2023

글 고성연

동시대의 사회와 문화를 반영하는 주요 이슈를 ‘현대미술’이라는 렌즈를 통해 부각하고 담론의 장을 펼쳐내는 국제 미술전.
그중에서도 2년마다 치러지는 미술제를 뜻하는 ‘비엔날레(biennale)’의 역사는 1895년 베니스 비엔날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러 국적이나 배경의 작가들이 참가하지만 엄연히 경연 대회는 아닐진대, 문화 예술 분야에서 각 나라의 자존심을 겨룬다는 차원에서 ‘미술계 올림픽’으로 여겨지기도 한다(실제로 베니스 비엔날레는 국가관에도 상을 주기에 늘 화제와 비판을 동시에 맞닥뜨린다). 1990년대에는 세계적으로 새로운 비엔날레가 많이 생겨났고, 광주비엔날레도 이 시기에 등장했다(1995년). 벌써 14회를 맞이한 광주비엔날레의 존재감은 정말로 우리나라를 넘어 아시아를 대표하기에 충분할까? 곧잘 정치권의 도구로 씁쓸하게 활용되면서 잡음을 낳기도 했지만 나름의 긴 여정을 버티며 꾸려온 광주비엔날레의 현주소와 진화에 대한 잠재력을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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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 강타를 날린 팬데믹의 발발로 문화 예술계 일정도 꼬여버렸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네 짝수 해 가을은 ‘비엔날레의 계절’이었고 광주비엔날레는 그 대열에 속하는 대표적인 행사였는데, 코로나19라는 복병의 등장으로 불가피하게 연기되는 운명을 겪으면서 이례적으로 2021년 봄에 열리게 됐다. 그리고 올봄에 다시 찾아왔다.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soft and weak like water)’라는 제목을 내걸고. 이숙경 예술감독이 도가(道家)의 근본 사상을 담은 <도덕경>에서 차용했다는 이번 본전시 타이틀과는 사뭇 거리감이 느껴지는, 비엔날레(biennale)와 비엔나(Vienna) 소시지의 조합(?)을 내세운 광주시의 홍보 영상이 노이즈 마케팅 효과를 냈는지 여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것 같다. 어차피 큐레이터는 전시로 말하고, 뮤지션은 음악으로 말하는 법 아닌가.
사실 오늘날 글로벌 비엔날레에서 던지는 메시지를 담은 키워드 자체는 대동소이하다. 저항, 해체, 생태, 연대 등등.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촌이 끌어안고 있는 공통의 문제를 다루기에 어쩌면 당연한 모습일 것이다. 영국 테이트 모던 국제 미술 수석 큐레이터로 활동해온 이숙경 예술감독 역시 비슷한 결로, 전환과 회복의 가능성을 지닌 ‘물’을 하나의 은유이자 원동력, 혹은 방법론으로 삼고, 이를 통해 우리가 사는 지구를 저항과 공존, 연대와 돌봄의 장소로 상상해볼 것을 제안했다. 관건은 이 메시지를 자신의 시각과 사고, 감성을 바탕으로 심미적으로, 효과적으로 전달하느냐에 있는데, 이숙경 감독은 절제된 ‘부드러움’ 속에서 은은하면서도 명징하게 목소리가 울려퍼지는 듯한 연출을 합리적으로 실현해냈다. 그녀의 말처럼 힘을 뺏기에 외려 ‘조용하게’ 와닿는다. 노후된 비엔날레 본전시관의 ‘공간으로서 한계’가 있었음에도 작품들이 서로의 영역을 과하게 침범하지 않으면서 조화롭게 조응해나가는 전체적인 전시 풍경이라든지, 전시 벽을 많이 활용하지 않는다든지, 작품 캡션을 하드보드지에 적어 붙여놓는다든지 하는 등의 친환경적 고려도 눈에 띄었다(전시 사이사이의 편안한 감상·휴식 공간은 좀 아쉬웠지만).
무엇보다 작가와 작품 선정이 ‘참신함+질’의 조합에서 준수했다. 대단한 스타급 작가들이 즐비하거나 ‘소수성’만 내세운 듯한 작가 선정이 아니라 각 섹션에 맞춰 무게감 있되 진부하지 않은 글로벌 중진 작가와 젊은 재능의 조화가 흥미로운 구성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어쩌면 광주비엔날레의 장점이자 단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는 특수성(광주 민주화운동)을 인식하지만 한발짝 물러서 지긋이 응시하는 듯한 태도가 필자 개인적으로 반갑게 다가왔다. 가슴 아프지만 늘 비슷하게 반복되는 듯한 레토릭의 제약 같은 부분이 아쉬운 적도 있기 때문이다. 전시 감독이 강조하듯 ‘광주 정신’ 자체에 공명하면서도 모든 형태의 억압에 저항하며 연대하는 방식을 연결 지어 읽어내는 프로그램 구성과 연출은 앞으로 광주비엔날레를 이끌어갈 차기 주자들이 참고할 만한 사례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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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광주비엔날레의 진정한 성공은 그 존재의 뿌리여야 할 지역 주민들이 미적 충족과 영감, 사유를 누리는 데 있지 않을까? ‘예향의 도시’를 표방하는 광주에서 정작 시민들이 비엔날레를 유유자적, 혹은 진지하게 즐기는 모습이 아직은 익숙하고 흔한 풍경으로 다가오지는 않는 것 같다. 상당히 큰 규모의 예산과 홍보 자원을 동원하는데도 말이다. “그러게요. 왜 우리 광주 사람들이 전시를 많이 보러 가지 않을까요?” 광주비엔날레 전시장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차를 모는 기사분의 한숨 섞인 웃음을 곁들인 답을 여러 각도에서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현대미술이 지닌 ‘난해한 그들만의 리그’라는 이미지를 포함해서 말이다. “오 예술이여, 너는 어디서 와서 이렇게 기이한 존재를 키워냈으냐. 너는 어떤 사람들을 위한 것이냐…”라는 저명한 미술가들(길버트와 조지)의 짓궂은(?) 미술에의 송시가 지역 주민들에게는 정말로 ‘현타’처럼 실감나게 와닿을 수 있다. 이런 배경에서 볼 때 양림동의 아기자기한 골목길에 여러 국가의 미술 기관이 참여하는 파빌리온 프로젝트의 전시관(올해는 9개 국가관)이 마련되어 생기를 발산하는 모습은 흐뭇하게 느껴진다. 이런 시도들이 어려운, 혹은 낯선 현대미술이 사실은 우리 지구인의 삶을 은유적이지만 진지하게 풀어내고 있음을, 그것이 때로 잔잔하면서도 강력하게 세상을 바꿔나갈 동력의 씨앗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다 많은 이들이 알아갈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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