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사학자 도널드 서순은 인터넷 시대에 생산되는 문화 콘텐츠는 과거에 비해 일관성이 훨씬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일찌감치 주장했다. 콘텐츠가 ‘파편화’ 양상을 띠며 다양해지면서 소비자들은 선택의 폭이 넓어져 각자 자신이 선호하는 것에 집중하게 되기 때문이라는 논리다. 실제로 오늘날 미디어 기업이나 광고주가 그토록 갈구하는 ‘관심’을 이끌어내기가 무척이나 힘들어졌다. 다양성이 풍부해진 시대인 만큼 희소가치 또한 늘어난 관심, 그 영예로운 타이틀을 얻기 위해 문화 콘텐츠가 똑똑하게 진화하고 있는 것일까?
2006년 시사 주간지 <타임>은 ‘올해의 인물’로 ‘당신(You)’을 선정했다. 흔히 ‘보통 사람들’로 표현되는 개개인 모두가 블로그나 유튜브, 온라인 소셜 네트워크 공간 등에서 영향력을 키워가면서 사회·문화적 변혁의 주인공으로 자리매김했다는 평가를 내린 것이다. 당시 <타임>지 편집장은 “이 현상은 개인이 만들어낼 수 없다”라면서 예년처럼 어떤 인물을 특정하지 않고 ‘우리 모두’를 택한 이유를 밝혔다. 당시 대부분의 네티즌들이 특별한 외적 보상을 바라거나 개인 브랜드를 구축하려는 야망에 불타 사이버 공간에서 그토록 왕성하게 활동을 펼친 건 아니었을 것이다. 아무런 대가 없이도 때로는 ‘놀이’처럼 신명 나게, 때로는 ‘답답함’이나 ‘분노’를 저돌적으로 분출하고 다수와의 공감대를 형성해나간 이들이 많았다. 오늘날 이러한 디지털 연대는 소소하게는 유튜브 스타를 탄생시키기도 하고, 글로벌 차원에서는 위키피디아 같은 참여적인 방식의 웹 백과사전을 만들어내기도 했으며, 일부 국가에서는 심지어 대선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로 강력하게 작용하기도 한다. 힙합 음악가의 지지를 얻은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을 바탕으로 한 노래가 만들어졌고 가수, 운동선수, 배우 등 수십 명의 인기인이 자발적으로 이 노래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해 유튜브 같은 인터넷 매체를 통해 확산된 사례를 예로 들 수 있다. 1982년에는 컴퓨터가 특정 개인이 아닌 ‘존재’로서 <타임>이 선정한 ‘올해의 인물’로 뽑혔는데, 한 세대가 지나자 네트워크의 힘까지 가세해 ‘집단 지성’이 무럭무럭 자라나면서 미디어와 콘텐츠 생태계에 대대적인 변혁을 일으킨 것이다.
사실 1인 미디어를 비롯해 다양한 소통 매체가 생겨난다고 해서 대중매체의 영향력이 반드시 떨어진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단지 경쟁은 훨씬 더 치열해졌다. 콘텐츠를 다루는 채널과 크리에이터가 훨씬 다양해지고, 당연히 사람들의 흥미도 훨씬 더 다채롭게 분화되면서 반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사키 도시나오 같은 미디어 전문가는 이러한 다원화 경향으로 ‘매스’는 소멸하고, ‘소중(少衆)·분중(分衆)’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주장했다. 관심의 갈래가 사방팔방으로 흐르고, 이러한 ‘파편화’ 현상을 기꺼이 충족시키는 온갖 콘텐츠가 지구 어디에선가 솟아나는 모양새다. 그런데 이처럼 풍부하다 못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넘쳐나는 정보에 대한 접근성이 좋아지고, 그런 노출에 따른 피로도 역시 높아지면서 소중이든 대중이든 사람들의 ‘시선’을 온전히, 그리고 오래도록 붙잡기는 힘들어졌다. 안 그래도 현대인들은 대부분 실제 여가 시간과 상관없이 심리적으로는 늘 여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시간 예속자’들이다. 따라서 핵심은 5천만의 느슨한 눈길을 받는 것보다는 5만, 50만일지라도 폭발적인 지지, 또는 뜨거운 논의를 이끌어내는 데 있다. 결국 본질은 ‘진지한 관심’의 쟁취다. 개인이 댓글 놀이를 하든,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로 열심히 소식을 전하든, 방송사가 뉴스나 예능을 제작하든, 누가 됐든 콘텐츠를 제공한다면 결국에는 ‘나 좀 주목해달라!’고 손짓하는 ‘관심 경제’의 논리로 귀결되는 셈이다. 특히 대중의 인기를 기반으로 하는 정치인과 연예인은 그런 대열에서도 선두 주자일 것이다. 오죽하면 미국에서는 ‘워싱턴과 할리우드는 사실 경쟁 관계’라는 뼈 있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왔겠는가. 그 관심이 호의적이냐, 부정적이냐는 중요한 차이일 테지만 관심 끌기에 급급하다 보면 ‘나쁜 관심’이라도 무관심보다는 낫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니 콘텐츠는 갈수록 자극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게다가 많은 이들은 ‘진정성’을 외치고 ‘자극성’을 비난하면서도 실제로는 ‘애매하게 착한’ 콘텐츠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당장 드라마만 하더라도 관심의 척도인 시청률에서는 ‘막장’이 앞서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하지만 사람들은 비슷한 패턴에 예상 가능한 전개의 스토리라면 결국은 막장 드라마에도 흥미를 잃게 마련이다. 시청률이 어느 정도 나온다 해도 반짝 화젯거리에 그칠 뿐, 진정한 관심은 얻어내지 못한다. 그래서 막장도 진화까지는 아닐지라도 나름 변신을 시도하기도 한다. 가공할 만한 악녀 캐릭터를 창조해낸 <왔다! 장보리>나 스릴 있는 추리 구조와 집단 주인공을 내세운 <전설의 마녀> 같은 드라마의 인기는 통속극의 흥행 공식에서 자유롭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너무 뻔한 전개에서 벗어나려는 갖은 노력에 대한 보답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막장과 웰 메이드의 차이는 작품성과 만듦새에 있지 않은가. 뉴스에 빈번히 등장하는 황당한 현실의 면면만 봐도 막장극의 스토리가 꼭 억지스럽지만은 않다. 예컨대 최근 전 세계적으로 가장 ‘핫한’ 미드 시리즈로 꼽힐 만한 <하우스 오브 카드(House of Cards)>를 예로 들자면, 주요 키워드만 보면 거의 막장 분위기가 풍긴다. 권모술수와 배신, 불륜, 변태스러움, 살인까지. 그렇지만 실상은 탐욕스러운 정치판을 밀도 높게 그려낸 웰 메이드 정치극으로 에미상과 골든글로브 등 각종 영예로운 상을 휩쓴 데다 오바마, 힐러리 클린턴, 시진핑을 비롯한 정계 리더들까지도 마니아를 자처하고 나서게 한 흥행작이다.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점은 이 뇌세포를 깨우는 시리즈가 웹 드라마라는 사실이다. 더구나 미디어 콘텐츠의 전통 강자가 제작한 것도 아니다. 온라인 DVD 렌탈업체 넷플릭스가 1990년대 영국 BBC 드라마를 바탕으로 만든 ‘리메이크 버전’이며 이 기업이 자체 제작해 인터넷 스트리밍 형식으로 배포한 첫 작품이다. 넷플릭스는 자사 회원들의 취향을 분석해 저마다에게 작품을 권하는 ‘시네 매치’라는 영화 추천 엔진으로 유명한데, 이러한 강점을 활용해 ‘빅데이터의 미학’을 제대로 발휘해 신중하게 리메이크작 후보를 골랐고, 이를 책임질 만한 감독과 배우로 각각 데이비드 핀처와 케빈 스페이시를 선호한다는 점까지 파악해 실제로 기용했다고 한다. 이처럼 고객의 수요를 미리 꿰뚫고 반영하는 제작 방식은 ‘쌍방향 소통’을 강조하는 ‘미디어 2.0’ 시대의 흐름을 파악한 영민한 행보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일주일에 1~2회씩 내보내는 시리즈 배포의 전형을 깨고, 모든 에피소드를 한꺼번에 공개하는 파격도 감행했다. ‘몰아보기’에 익숙해진 요즘 세대들이 열광한 건 두말할 것도 없다.
<하우스 오브 카드>의 성공에 자극을 받았는지 ‘공룡’ 인터넷 서점 아마존이 영화 제작에 나선다는 소식이 들린다(아마존은 이미 TV 시리즈를 제작한 경험도 있다). 심지어 한 달에 한 편씩 개봉할 정도로 부지런을 떨 예정이란다. 또 넷플릭스는 내년쯤 한국에서도 직접 서비스를 할 전망이다. 이러한 현상은 콘텐츠를 소화하는 ‘플랫폼’을 둘러싼 온갖 진영의 싸움이 얼마나 치열하게 달아오르고 있는지도 보여주지만 전통적인 시청자의 개념이 사라지는 추세도 엿볼 수 있게 한다. <하우스 오브 카드> 같은 시리즈의 시청률은 기존 시스템으로는 파악할 수 없지만 가장 뜨거운 ‘관심’의 대상으로 손꼽힌다는 점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최근까지 가장 강도 높고도 호의적인 관심을 받은 토종 대중문화 콘텐츠는 아마도 <미생>이 아니었을까 싶다. 윤태호 작가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시청률 1%대에서 시작해 8%대로 막을 내리며 승승장구했는데, 그렇더라도 케이블 TV의 한계가 발목을 잡았는지 두 자릿수를 돌파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체감 효과는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미생의 성공 비결은 잘 알려져 있듯이 엉뚱한 러브라인이나 무리한 설정을 가미해 스토리라인을 훼손하는 흔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고 원작의 진정성을 지키면서도 캐릭터에 세세한 생명력을 불어넣으면서 드라마적 효과를 살렸다는 점이다. 더 중요한 건 단지 드라마적 재미만 선사한 게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취업, 직장 생활의 역학, 비정규직 문제를 상기시키고 우리네 삶을 곱씹어볼 수 있게 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사회적인 반향은 자연스럽게 커다란 화두를 만들어냈고, 남녀노소를 초월한 지지를 받았다. <미생>을 계기로 평소 남편들에게 챙겨주지 않았던 따뜻한 아침밥이라도 차려주고 술 마시고 귀가해도 ‘갈굼’을 덜 하게 됐다는 여성 시청자도 많았고, 외려 자신의 ‘현실’이 투영되는 듯해 차마 보지 못하겠다는 월급쟁이 남편들도 있었다. 극심한 취업난에 시달리는 비정규직을 대변하는 소위 ‘88세대’는 실시간으로 열띤 사이버 토론의 장을 펼치며 시청했다.
대중문화 콘텐츠의 실질적인 인기를 말해주는 바로미터 중 하나는 출연 배우들의 CF 출연 횟수다. 단지 ‘배경음’처럼 TV를 켜놓고 그 앞에서 시간을 보내는 시청자들보다는 실제로 여론과 소비를 주도하는 시청자층에 통하는 인물과 콘텐츠에 투자해야 하는 광고주야말로 관심 경제에 가장 관심이 많은 부류 아니겠는가. <미생>에서 활약한 조연 배우들까지도 각종 광고에 활발히 등장하는 모습은 시청률보다는 관심의 크기와 농도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물론 시청률 자체도 논의의 여지가 많은 잣대다. 방송통신위원회는 앞으로 통합 시청률이라는 방식으로 시청률을 조사할 전망이다.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콘텐츠를 볼 수 있는 미디어 환경을 반영해 스마트폰, PC, 태블릿 PC 등 소위 ‘N스크린’을 아우르는 시청률과 다시보기(VOD)까지 합산하는 조사 방식을 내년부터 도입하기로 하고, 올해는 시범적으로 적용하겠다는 계획이다. 한국인 10명당 3명이 TV가 아닌 N스크린으로 방송을 보고 있다는 방통위 자체 조사 결과도 이 같은 의지를 진작시킨 요소였던 듯하다.
어쨌거나 이런 변화는 시청자 입장에서는 긍정적일 가능성이 높은 듯 보인다. 관심의 촉수를 뻗친 콘텐츠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챙겨 보거나 때로는 이슈 메이킹에 나설 정도로 능동적이기까지 한 시청자층의 요구를 좀 더 반영하면 아무래도 보다 질 높고 다양한 콘텐츠를 양산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낳고 있기 때문이다. “언론인의 역할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를 가능한 한 재미있게 만드는 겁니다.” 최근 방한한 철학자이자 작가 알랭 드 보통은 한 방송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그건 예술가의 일처럼 어렵다고 부연했는데, 요즘은 묵직한 이슈를 흥미롭게 버무리는 일부 대중문화 콘텐츠가 그런 역할을 오히려 잘해내는 경우가 눈에 띄는 듯하다. 또 수용자들의 열띤 호응과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도 높다. 기업 드라마나 검찰청을 무대로 하는 수사 드라마의 경우, 주제나 서사 구조가 꽤나 복잡해 높은 이해도는 물론 능동적인 탐구 자세를 요하는데도 말이다.
이처럼 달라진 미디어 환경을 보노라면 <바보상자의 역습>이라는 책에서 많은 이들에게 무시당해왔던 대중문화는 저질, 통속이라고 무시하는 연예물을 통해 아주 조금씩 우리 뇌를 명민하게 만들고 있다는 저자의 주장이 꽤 설득력 있게 들린다. 앞으로는 사람을 ‘바보상자’에 빠지게 만드는 마약처럼 단순하고 유치한 작품이 잘 통하리라고 생각하는 콘텐츠 제공업자야말로 바보 신세가 될지도 모르겠다. 사실 ‘선택권’이 더없이 풍부해진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은 유치함을 파악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바보처럼’ 휴식을 취하고 싶을 때에만 그런 콘텐츠를 일부러 벗 삼거나 적막에서 벗어나기 위한 배경음으로 놔두는 것일 뿐, 정말로 의미 있는 관심을 두는 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