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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6, 2024

글 고성연

중추절(中秋節) 연휴를 틈탄 홍콩 문화 예술 산책

언젠가부터 홍콩행은 늘 ‘아트 위크’가 열리는 기간에 이뤄진 것 같다. 아시아 최대 규모의 글로벌 아트 페어인 아트 바젤 홍콩이 열리는 3월, 안 그래도 인구밀도 높은 복잡한 도시가 한층 더 빽빽하게 느껴지는 이 시기에 뾰족뾰족 솟아 있는 마천루 사이로 뛰어다니면서 분주한 일정을 소화하던 나날. 팬데믹으로 수년에 걸친 공백기를 맞이하게 되었을 때 처음엔 갑작스러운 휴가라도 받은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이듬해에는 그 ‘광란의 주간’이 슬슬 그리워졌다. 어느새 단골처럼 느껴지는 레스토랑의 맛난 메뉴들이 아른거리고, 번잡한 도심 한가운데서 트램을 타면 홍콩섬에서 제일 높다는 빅토리아 피크에 올라가 눈부신 풍경을 한눈에 담는 스트레스 해소책도 이따금씩 뇌리를 스쳤다. 언뜻 좁다랗게 얽혀 있는 미로 같지만 웬만해선 택시를 탈 필요 없이 도보로 돌아다닐 수 있는(곳곳에 뻗어 있는 에스컬레이터와 엘리베이터의 도움으로), 겨우 익숙해진 듯했던 특유의 지름길은 제대로 기억해낼 자신이 없어졌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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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과 풍경, 그리고 매혹적인 골목을 품은 언덕길에 더해 가장 그리웠던 건 아무래도 ‘작지만 강한 허브 도시’로서의 기억이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발품의 고통’을 쉽게 잊게 해주는 아담한 규모에(홍콩섬만 따지자면 서울의 2할 정도), 그런데도 놀랍도록 다면적이고 모순적인 매력을 지닌 터라 양파 껍질 벗기듯 차츰 애정을 쌓아 올린 도시이기도 하다. 잘 알려졌듯 홍콩은 1세기 반 넘게 영국의 식민지로 있다가 1997년 중국에 반환됐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동서양의 혼혈아로서 묘한 정체성을 지니게 됐는데, 지리적 위치와 면세 지역의 이점을 등에 업은 금융과 무역의 허브였지 문화적인 도시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심지어 ‘문화의 사막’이라는 별명도 지니고 있었는데, 2013년 스위스산 페어 브랜드인 아트 바젤이 홍콩으로 진출한 것을 계기로 정부 차원의 투자와 큰손들의 후원이 이어지며 점차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실제로 미술관이든, 콘서트홀이든, 복합 공간이든 쟁쟁한 경쟁력을 갖춘 결과물을 꾸준히 내놓았다. 그래서 팬데믹이 휘몰아치기전에는 해마다 춘삼월이 가까워지면 올해는 또 어떤 새로움을 맞닥뜨릴지 내심 기대하게 됐고 말이다. 홍콩의 봄이 다시 열린 지난해, 가장 반가웠던 존재는 아시아 최고의 비주얼 아트 센터를 표방하는 M+였다. 기나긴 공사 끝에 2021년 늦가을 처음 모습을 드러냈는데, 하늘길의 제약이 심했던 터라 필자를 포함한 대다수 해외 방문객들에게는 첫 만남이었다. 마침내 마주한 M+는 건축의 오라, 그리고 일본의 스타 작가 구사마 야요이(Yayoi Kusama) 회고전을 내세워 대중의 심리를 성공적으로 공략했다. 하지만 팬데믹 이후의 홍콩은 결코 예전 같지 않다는 시선도 많았던 게 사실이다. 특히 2024년 아트 주간, 그러니까 지난봄의 홍콩은 전반적인 미술 시장 침체와 궤를 같이해 활기가 덜했다. 그런데 차분함과 설렘이 공존하는 듯한 홍콩의 올가을 풍경은 꽤 참신했다. 페어 자체의 실적과는 상관없이 과열된 느낌이었던 서울의 초가을 미술 주간을 겪고 나서일까? 게다가 현지인들도 잠시 숨을 고르고 달 감상과 월병 먹기를 즐기는 중추절(中秋節)의 낭만이 깃들어서인지 활기가 흘렀다. 구룡반도 M+에서는 아시아인으로 오트 쿠튀르 업계의 주목을 받아온 패션 디자이너 궈페이(Guo Pei)의 전시 개막 전행사로 셀럽과 문화 예술계 인사가 출동한 갈라가 열렸고, 홍콩 센트럴 지구에서는 새 랜드마크인 ‘더 헨더슨’ 빌딩에서 모네, 고흐와 나란히 김환기 작품이 경매에 부쳐지기도 했다. 인근의 갤러리 하우저앤워스 홍콩에는 내년 서울에서(APMA) 개인전을 개최할 예정인 미국 작가 마크 브래드퍼드의 전시와 더불어 그가 참여하는 현지 아동과 청소년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이 펼쳐졌다. 적어도 필자가 아는 홍콩의 지인들은 대부분 휴일에도 일하면서 얼굴을 찡그리지 않았다. 마치 ‘문화 예술 허브’로서의 입지를 결코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피로 사회’를 살아가는 한국인의 시각에서도 역시 이들은 참 부지런히산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의 추석과 달리 홍콩에서는 중추절 당일이 딱히 휴일도 아니다(다음 날이 공휴일로, 직장인들은 오후쯤 일찌감치 귀가해 가족과 저녁을 먹고, 온갖 불빛이 마천루를 휘황찬란하게 감싸는 야경 속 행사를 즐긴다). 필자도 낮에는 M+에서 온갖 전시를 섭렵하는 ‘일’을 열심히 하다가 저녁에는 스타페리를 타고 센트럴 지구로 향했다. 1천원도 안되는 편도 요금을 내고 탄 선상에서 홍콩 최고층 건물인 리츠 칼튼 호텔의 파사드를 수놓은 중추절 축하 메시지를 보노라니 문득 한 저자가 쓴 책이 떠올랐다. 그 제목처럼 ‘잊을 수 없는 도시’로서 홍콩의 매력이 부디 유지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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