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owly But Sure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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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05, 2024

글 고성연 ㅣ 사진 고성연


타이베이 아트 주간 2024


#봄날의 현대미술 행사에 글로벌 관람객들을 맞이하는 타이베이의 자세


●       대만에 다녀온 이들을 만나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아마도 “사람들이 친절하다”가 아닐까 싶다. 아니면 “맛난 음식이 많다”든가. 런던 유학 시절, 요리하기를 즐기고 솜씨도 꽤 좋은 타이베이 출신의 애교 많고 상냥한 친구를 둔 덕분에 필자는 그녀의 모국에 가보기도 전에 이미 친절한 대만인과 다채로운 미식의 세계를 접해본 듯한 느낌을 겪어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 실제로 대만을 처음 방문했을 때 이 느낌은 현실에서 제대로 구현된 듯 싶었다. 유난히 오래 진행되었던 한 문화 예술계 행사에서 혹여 지루할까 싶어서인지 옆에 웅크려 앉아 사회자와 출연자들이 구사하는 현지어를 일일이 영어로 통역해주려 애쓰던 누군가의 세심한 배려와 더불어 그날 밤 ‘cherry duck’으로 불리는 일란(宜蘭) 지방(대만 북동부)의 오리고기를 얹은 스시를 정말로 맛나게 먹은 기억이, 벌써 10년도 더 된 일이지만, 아직도 곱게 저장되어 있다.


●●     태평양 서쪽 끝, 일본과 필리핀 사이에 있는 작은 섬나라 대만. 16세기 포르투갈 항해사들이 풍광에 매료되어 부른 것을 계기로 ‘아름다운 섬’이라는 뜻의 ‘포모사(Formosa)’라는 불리게 된 이 나라는, 그 뒤로도 찾을 때마다 대체로 가성비까지 갖춘 풍부한 ‘미식’과 ‘친절’이 마치 디폴트로 탑재되어 있는 양 변함이 없다. 물론 폭넓고 심오한 맛의 세계를 깊이 파고들 정도의 경험치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필자에게 더 흥미로웠던 풍경은 ‘문화 예술’이었을 것이다. 수도 타이베이의 미술관을 몇 차례 방문하면서 점차 알아가기 시작했는데, 언뜻 보이는 화려함을 품고 있지는 않지만 조금씩 익숙해질수록 매력이 자꾸만 드러난다. 겉보기에는 대체로 자연스럽고 소박한 정서가 흐르는 가운데 단단한 내실이 자리하고 있는 게 ‘백미’다. 그 기저에는 ‘책 순례자의 도시’라 불릴 정도로 독서를 사랑하는 지적인 시민들이 넘치고, 녹지 공간 비율이 높은 ‘녹색 도시’를 가꿔나가며, 전통을 아끼고 보존하는 데 열심이지만 문화적 다양성을 포용하는 메트로폴리스로서의 자긍심이 깔려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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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대만과 한국은 근현대사를 돌아보면 ‘도플갱어’라는 단어가 등장할 정도로 닮은 구석이 많다. 19세기 말부터 민족을 고달프게 했던 전쟁과 식민지화(일본의 지배), 가파른 경제성장, 민주화의 시련 등 주요 궤적을 볼 때 그렇다. 그런데 문화적인 개방성이나 ‘다름’에 대한 포용성은 대만이 확실히 눈에 띈다. 아시아에서 최초로 동성혼이 합법화된 나라(2017년)가 바로 대만 아니던가. 2020년 초 타이베이에서 만난 예술가 오스카 무리조(Oscar Murillo)는 아시아 도시들을 여럿 다녔지만 “이 도시는 열려 있음이 느껴지고, 뭔가 편하다”고 말한 적도 있다. 그렇지만 서두르지는 않는다. 2020년 초 아트 페어인 타이베이 당다이(Taipei Dangdai Art & Ideas)를 찾았을 때 이곳 컬렉터들은 천천히 지켜보고 신중히 결정한다는 얘기를 참 많이 들었다. 영국인 문화 사업가가 설립한 당다이 페어를 경계하는 눈빛도 있었다. 팬데믹 탓에 올봄 무려 4년 만에 다시 찾은 당다이 페어의 모습은 약간 낯설었지만 반가웠다. 규모 자체는 줄었지만, 현지인의 의미 있는 관심이나 참여가 늘어난 듯한 분위기였고, 무엇보다 도시 자체의 ‘지원’이 느껴졌다. 주요 미술관에서 공들인 기획전을 열기도 하고 새로운 공간이나 프로그램을 대중에 공개하는 시기를 맞추는 등 훨씬 더 다각적인 노력이 엿보였다. 그렇게 ‘아트 주간’이 완성되어가는 느낌이다. ‘천천히, 확실한’ 발걸음을 내딛는 그들만의 ‘만만디’ 정서가 스며든 당다이 페어는 그래서 규모가 작아도 ‘glocal’을 떠올리게 하는 글로벌 아트 페어로 나아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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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베이 당다이(Taipei Dangdai Art & Ideas) 2024

2019년 초에 출발한 현대미술 장터 타이베이 당다이(Taipei Dangdai Art & Idea, TPDD)는 초반부터 내실 있기로 알려진 아트 페어다. 세 자리 수의 갤러리가 참가하는 아트 바젤 홍콩과 달리 규모 자체는 크지 않지만 명단에 들어 있는 갤러리들의 명성이나 지역·국가별 ‘균형’ 면에서 높은 점수를 받을 만했고, 실제로 성과도 준수했다고 알려졌다. 2020년 초의 당다이 아트 페어는 실제로 관람객 입장에서는 발품을 파는 수고에 비해 양질의 콘텐츠를 밀도 있게 즐길 수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이는 면적 자체나 인구, 그리고 인구밀도 등을 감안할 때 서울보다 현저히 ‘도시 산책’에 나서기 편한 타이베이의 아트 신과도 비슷한 매력이다. 기나긴 팬데믹 기간을 뒤로하고 4년 만에 다시 찾은 타이베이 난강 전시 센터는 건재했고, 페어장 풍경은 여전히 아기자기했다. 다만 화창한 5월에 열리는 점이 달라졌다(2022년부터). 올해는 폭우가 한차례 몰아닥친 뒤라 상대적으로 쾌적한 날씨를 곁들인 페어 주간을 누리기도 했다.



#나흘 일정으로 펼쳐진 아트 페어 이모저모


●    지난 5월 9일 오후, 타이베이 난강 전시 센터. 타이베이 당다이(Taipei Dangdai Art & Idea, TPDD) VIP 프리뷰가 진행되는 날이라 다국적 인파가 몰리고 복작복작대는 풍경이 연출됐다. 개막식에는 페어를 주최한 ‘디 아트 어셈블리(The Art Assembly)’의 주요 인사들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디 아트 어셈블리는 아시아 대륙에서 설립된 3개의 주요 국제 미술 페어(당다이를 비롯해 싱가포르의 아트 SG, 일본의 도쿄 겐다이)가 결합된 조직이며 아트 페어 전문가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타이베이 당다이의 공동 디렉터는 현지인을 놀라게 할 정도로 유창한 만다린어를 구사하며 중국을 위시한 아시아 네트워크를 책임지고 있는 로빈 페컴(Robin Peckham)과 영국을 비롯한 유럽과 홍콩 시장에서 인맥과 노하우를 쌓아온 매그너스 렌프루(Magnus Renfrew)가 맡고 있다. 그런데 좌중의 이목을 가장 집중시킨 인물은 타이베이의 40대 시장 장완안(蔣萬安)이었다. 장제스(蔣介石) 전 대만 총통의 증손자로 1978년생의 국민당 기대주인 장완안 시장은 “‘아트 바이브(art vibe)’의 관점에서 타이페이는 훌륭한 도시”라며 “다만 애석하게도 페어 일정이 너무 짧으니 부디 체류 기간을 늘려달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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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전 세계적으로 미술 시장은 하강 곡선을 타고 있다. 지난 수년 동안 워낙 미술 시장의 상황이 좋았기에 굴곡을 탈 때가 되기도 했고 전반적인 경기 침체의 여파이기도 하다. 올해로 5회를 맞이한 타이페이 당다이는 전 세계 19개 지역·국가에서 온 78개 갤러리가 한자리에 모여 9일 VIP 프리뷰 데이를 시작으로 나흘간에 걸친 행사를 펼쳤다(공식 일정은 5월 10~12일). 시장이 꺾여 있을 때는 아무래도 참여하는 갤러리나 지갑을 여는 컬렉터 입장에서나 ‘신중해지는’ 분위기가 형성되기 마련이다. 전문가들은 갤러리들이 이럴 때 “명확한 제안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사실 컬렉터 입장에서는 외려 작품 수집에는 적기라고 여기며 반기는 이들도 있다(물론 인기 있는 작가는 크게 불황을 타지 않고, 여전히 경쟁이 치열하지만 말이다). 올해 당다이 페어는 90개 갤러리가 참가한 지난해보다 규모를 줄였지만 방문객 수는 소폭 증가한 3만5천1백25명으로 집계되면서 적어도 ‘관심도’에 있어서는 나름 선방했다는 평가를 얻었다.


●●●    실제로 첫날 페어장 자체는 상당히 활기가 흘렀다. 당다이 페어의 프로그램 자체가 풍부해진 덕분이기도 하다. 주요 갤러리들이 선보이는 갤러리즈(Galleries) 섹터를 비롯해 떠오르는 작가들의 개인 부스를 지원하는 에지(Edge), 대규모 몰입형 작품을 전시하는 노드(Node), ‘문화로서의 수집’이라는 주제의 강연 시리즈로 돌아온 ‘아이디어 포럼’ 등 각 섹터별로 다채로운 프레젠테이션을 시도했으며,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아티스트들의 단독 또는 선별 전시를 마련하는 에보크(Evoke) 섹터를 새롭게 론칭했다. 또 방문객들이 가오슝 미술관, 타오위안 미술관, 관두 미술관, 윈싱 예술재단 등 타이베이와 대만 전역의 다양한 미술관, 예술 기관에서 접할 수 있는 전시회를 소개하는 ‘카페 컬처’라는 새로운 라운지 공간도 선보였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최초로 대만 문화부와 공동 주최한 기획 전시 <천둥이 치기 전에(Before Thunders): 대만 아티스트 전시회>였다. 공공과 민간을 가리지 않고 대만의 전반적인 아트 신에 걸친 파트너십 구축이 훨씬 더 활발하게 흘러갈 것으로 점쳐지는 긍정적 신호처럼 보였다. 메가 갤러리들은 예전에 비해 덜 눈에 띄었지만 그래도 데이비드 즈워너, 페로탕, 에릭 파이어스톤, 갈레리아 콘티누아 등 구미 지역 갤러리들도 참가했고, 한국의 비중이 꽤 높다는 점도 눈에 띄었다(갤러리바톤, 조현화랑, 가나아트, G갤러리, 서정아트, 파운드리서울, 에이라운지, 아트스페이스 3 등). 갤러리바톤 관계자는 “배윤환의 생동감 있는 구상 회화, 최수정의 빛의 작용과 색채에 주목한 회화는 컬렉터들의 큰 관심을 받았다”며 “올해 한국에서 개인전 순회(2024)를 진행 중인 리너스 반 데 벨데와 지난해 스페이스 K 개인전을 통해 대중적인 인지도가 확대된 유이치 히라코의 신작에 대한 지속적인 성원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갤러리 관계자는 “타이베이 시장은 단기간 승부를 보려고 오면 안 된다”며 ‘천천히, 확실하게’의 정서를 기억할 것을 스스로 다짐하는 듯 미소를 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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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Slowly But Surely! 타이베이 아트 주간 2024  보러 가기
02. 대만다운 ‘아트 신(scenes)’을 만들어간다는 것은?  새롭게 꿈틀거리는 현대미술 풍경 속 2, 3세대 동력  보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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