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트로 감수성을 품은 바에서 엿보이는 창업가 정신
좀처럼 시들지 않는 ‘레트로’ 열풍은 그저 지나가버린 황금기를 그리워하는
정서의 반영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레트로 감수성은 장난기 어린 호기심에 과거에서 재미와 매혹을 찾을 뿐, 분명 현재를 감각적으로 반영하고 미래를 추구하는 진취성도 품고 있다고 보기도 한다. 요즘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젊은 창업가들이 창의적으로 바(bar) 르네상스를 열어가는 광경을 보노라면 꽤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시각이다.
문명이 첨단을 달리고 있는 변화무쌍한 디지털 시대에, 묘하게도 복고(復古) 열풍은 지치지도 않는 듯하다. 유행은 돌고 돈다지만 패션, 음악, 책, 미식 등 여러 분야에서 레트로풍이 수년째 꾸준히 인기를 누리고 있다. 단지 옛 감성을 살린 레트로 스타일의 상품과 서비스를 선보이는 정도가 아니다. 1990년대에 인기를 끌던 아이돌 그룹들이 재결성을 한다는 소식이 들리고, LP 레코드가 다시 발매되는 경우가 심심찮게 생겨나고 있으며, 부루마블 같은 고전 게임을 즐길 수 있는 복고풍 카페가 명소로 떠오르는가 하면, 서점가에서는 초판본 디자인을 그대로 재현한 복각본이 눈에 띈다. 이른바 ‘노스탤지어 산업’, 혹은 ‘추억 비즈니스’를 둘러싼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는 모양새다. 누군가의 표현대로 요즘 ‘대중문화는 과거에 중독된 듯’하다. 이런 현상을 두고 일각에서는 현대의 콘텐츠가 옛것만 못하다는 시선, 또는 문화적 퇴행이나 재탕이 아니냐는 부정적인 시각이 불거지고 있기도 하다. 레트로(retro)라는 단어 자체도 본디 퇴보나 역행이라는 부정적인 뜻을 품고 있지 않은가. 어떤 면에서는 일리 있는 해석이지만 반드시 그렇기만 할까? 레트로 문화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을 시도해온 영국의 음악 평론가 사이먼 레이놀즈가 말했듯이 요즘 우리는 살아보지도 않은 시대를 향한 노스탤지어를 품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1960년대의 해외 풍토를 몸소 겪지 않고도 대중문화 전성기였던 ‘스윙잉 런던’을 얘기하고, 1980년대에 성장하지 않았으면서도 복고 신드롬을 몰고 온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 열광하는 대중이 있지 않은가. 누군가에겐 따스한 추억담이 다른 누군가에겐 참신한 충격으로 느껴지는 법이다. 레트로 비즈니스가 기성세대에는 스스로 겪었든 아니든 동시대를 살아온 이들과의 공통적인 감성을 다시금 음미할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하고, 젊은 세대에는 신선한 감수성을 안겨준다는 맥락에서 경쟁력을 인정받는다는 분석은 그래서 꽤 설득력을 지닌다.
앨리스 청담은 지난해 4월 탄생한 ‘신생 바’인데도, 올해 초 모 잡지 선정 ‘베스트 바 1위’라는 영예를 꿰찬 바 업계의 총아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는 콘셉트를 내세운 만큼, 입구에는 흔한 간판 하나 달려 있지 않은 데다 안으로 들어가면 꽃집이 등장하는, 비밀스러운 공간이 연상되는 독특한 바다. 꽃집을 통과하면 레트로 느낌의 흥미로운 바 공간이 펼쳐진다. 무게를 잡기보다는 즐겁고 캐주얼한 분위기를 추구하기에 예쁜 헝겊으로 만든 잔 받침, 토끼 모양 글라스 같은 귀엽고 정감 있는 소품을 비롯해 인테리어가 아기자기하고 여성스럽다. 음악도 비트 있는 스윙 재즈 등이 자주 흘러나와 활달하면서도 친근한 분위기가 넘친다. 신세대 취향의 바답게 오너 바텐더가 SNS를 통해 고객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마케팅 감각이 돋보인다. 바에 대한 고정관념을 탈피하고 싶었다고. 앨리스 청담 매니저는 “요즘은 정말 술을 잘 알고 마시거나 술에 대해 일부러 배우려는 이들도 많아졌다”며 글렌리벳, 아드벡 같은 싱글 몰트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즐기는 여성 고객도 상당하다고 말한다.
‘경계의 허물어짐’이 특징인 이 시대에 어울리는 곳도 눈겨여볼 만하다. 공간이 크든 작든 그 안에 다채로운 매력 포인트를 한꺼번에 품고 있는 참신한 바가 있다. 일본의 록 밴드 이름을 차용했다는 미스터 칠드런은 셜록과 루팡 바 출신의 바텐더 2명이 의기투합해 지난 5월 청담동에 문을 연 ‘신참’인데, 양파 껍질 같은 매력이 단연 돋보이는 곳이다. ‘철들지 않는 어른’을 위한 장소로 꾸미고 싶었다는 이 바는 크게 세 공간으로 나뉘어 있다. 먼저 입구에는 맥주와 핫도그 등을 즐길 수 있는 펍이 있고, 그 안에는 레트로 감성이 가미된 의젓한 거실 같은 분위기의 메인 바가 나온다. 사실 이 공간도 2개로 나눌 수 있다. 안쪽에 방이 하나 있는데, 벽으로 막혀 있는 듯 보이지만 미닫이문을 열면 하나의 공간으로 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팔색조 같은 공간을 연출하고 싶었다는 오너 바텐더들의 소망을 실현해준 디자인 스튜디오 공팔이칠의 이름도 당당히 새겨져 있다. 콘텐츠가 있어야 차별화가 가능하다는 생각에서 매번 콘셉트가 다른 파티를 열면서 호응을 얻고 있다. 트렌드를 이끄는 애주가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청담동의 또 다른 인기 바 키퍼스(Keepers’) 역시 공간의 다중성이 매혹적이다. 언뜻 건조해 보이는 일반적인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선실을 연상케 하는 빨간색 문부터 남다르다. 문을 열면 우아하고 화사한 샹들리에와 뉴올리언스에서 공수한 포스터, 인기 만점의 프리미엄 보드카 엘릭스의 디자인을 활용한 선반 등 감각적인 가구와 소품으로 ‘콜라주’처럼 흥미롭게 꾸민 특색 있는 공간이 단숨에 눈길을 사로잡는다. 격조가 느껴지면서도 자유로운 분위기다. 그리고 그 안에는 또 다른 느낌의 방이 들어서 있다. 남색 벽에 정갈한 느낌의 가죽 소파, 뿔 달린 사슴 장식. 훨씬 클래식한 분위기다. ‘이탈리아’, ‘북유럽’ 등 1~2개월마다 콘셉트를 바꿔 다양한 메뉴를 선보이는 키퍼스에서는 그 과정에서 독특한 창작 칵테일이 탄생한다. 당연히 바텐더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만, 그게 서운하지 않을 만큼 인기도 높다. 예컨대 ‘브라질리언 워치(Brazilian Watch)’는 단맛과 부드러움, 보디감을 갖춘 비앙코라는 술을 베이스로 하고 상큼한 과일인 패션프루츠를 활용해 만든 독특한 칵테일인데, 부두 콘셉트를 적용했다는 해골 모양의 글라스가 멋지게 어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