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cy+Jorge Or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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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6, 2016

글 고성연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한 아티스트가 있다. 그중 예술에 대한 고정관념을 거부하고 ‘삶으로서의 예술’을 외치면서 자유롭게 경계를 넘나들었던 요제프 보이스 같은 개념 미술가도 있다. 캔버스가 아니라 ‘사회’를 조각한다고 주장했던 그의 후예 중 환경과 사회적 변혁의 메시지를 예술로 전달하는 데 있어 주목할 만한 행보를 보여온 아티스트 듀오 루시 + 호르헤 오르타 듀오와 창업자의 철학을 바탕으로 주관 있는 아트 경영을 펼치는 에르메네질도 제냐의 뜻깊은 파트너십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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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아트에 ‘꽂힌’ 기업이나 브랜드가 눈에 띄게 늘었다. ‘아트가 대세이긴 한가’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그런데 아트를 매개체로 브랜드만 부각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든지 화려한 눈요기에 치중한다든지, 아니면 인심 좋게 후원을 하긴 하는데 진중한 철학이나 맥락 있는 고민은커녕 그저 꽤 영리하다 싶은 수준의 전략조차 엿보이지 않는 경우가 상당수다. 결코 투자가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수준 높은 아트 경영, 또는 아트 협업(collaboration)에는 단단한 사회·문화적 토대와 깊은 사유, 창의성이 요구된다. 그리고 브랜드가 지켜온 정체성과 추구해온 이미지의 본질에 맞는 전시 콘텐츠와 공간, 그리고 서로의 신념을 공유할 수 있는 아티스트를 찾아야 함은 물론이다. 이런 차원에서 양자가 상당히 성공적인 닮은꼴이라고 느낀 사례가 아티스트 듀오 루시+호르헤 오르타(Lucy+Jorge Orta)와 에르메네질도 제냐의 만남이다. 명품 브랜드와 다분히 비상업적인 예술가의 조합임에도 우리를 둘러싼 자연을 비롯한 환경에 대한 진지한 관심과 실천적 자세를 공통분모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은근히 어울린다.

자연, 인간에 대한 사랑과 경외를 예술로 풀어내다
환경에 대한 메시지를 예술적으로 풀어내는 영역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떨쳐온 루시 오르타, 호르헤 오르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부부 아티스트다. 영국 출신으로 패션 디자인을 전공하고 쿠튀르 브랜드에서 일하던 루시가 1990년 대 초 아르헨티나의 독재 정권 아래에서 사회·정치적 맥락의 현대미술을 해오던 호르헤를 만나 뜻을 함께했고, 이후 둘은 지금까지 파리를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쳐오고 있다. 다양한 사회문제에 관련된 메시지를 전달하는 예술을 지향하는 만큼 주제마다 시리즈 작업을 주로 하는 이들의 첫 공동작은 ‘레퓨지 웨어(Refugee Wear)’ 시리즈. 옷인 동시에 이동 가능한 거주지를 연상시키는, 그래서 건축과 의복의 기능이 물리적, 사회적, 상징적으로 통합될 수 있다는 의미를 전달하는 ‘입을 수 있는 조각’이다.
오르타 듀오는 자연과 환경, 식량 문제를 예술에 접목하는 작업도 꾸준히 해왔는데, 그 물꼬를 튼 것이 1996년. 당시 자유무역으로 농산물 수입이 개방됨에 따른 타격을 우려해 농림업자들이 1996년 유럽연합(EU) 결성에 반대하는 시위를 대대적으로 벌였는데, 파리 거리마다 과일, 채소 같은 작물을 쏟아버리는 광경을 보고는 안타까움을 느낀 이들은 땅에 떨어진 음식을 주워 깨끗이 씻은 다음 만찬을 차렸다. 그리고 이듬해 식품을 둘러싼 윤리 의식을 주제로 한 전시 <All in One Basket>을 열었다. 1999년에는 식품 낭비는 물론 식량 분배의 불평등 문제까지 다룬 <HortiRecycling Enterprise> 전시를 개최했고, 2000년에는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모여 식사를 하면서 특정한 이슈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70X7 The Meal’라는, 일종의 의식(ritual)이라 할 수 있는 행위예술을 펼쳤다. 주거, 난민, 식량, 환경 등 인간의 사회적 생존을 위협하는 각종 문제를 데생, 조각, 사진, 비디오, 퍼포먼스 등 다양한 방식의 예술로 풀어내며 더 나은 세상을 다 같이 만들어가자는 메시지를 널리 알려온 이들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07년 UN에서 친환경 분야에서 공헌한 예술가에 수여하는 ‘그린 리프 어워드(Green Leaf Award)’를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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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냐트(ZegnArt)와 공유하는 생태계 중심의 가치
자연환경과 사회적, 문화적 환경을 생각해 아트 후원을 추구해온 기업이라는 점에서 에르메네질도 제냐와 오르타 듀오의 만남은 ‘필연’인 듯하다. 이탈리아 비엘라 지역에 뿌리를 둔 제냐 가문은 고향이자 자사 소유의 방직 공장이 자리한 마을 트리베로(Trivero)에 병원, 학교, 스포츠 시설 등을 지으면서 지역 발전과 사회복지에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불모지나 다름없던 땅을 개발해 살기 좋은 곳으로 변모시켰다. 또 제냐의 아트 프로젝트인 제냐트(ZegnArt)를 이끄는 창업자의 딸 안나 제냐는 이 지역의 환경과 문화를 보존하고자 100㎢가 넘는 방대한 면적의 친환경 생태 공원인 ‘오아시 제냐(Oasi Zegna)’를 만들었다. 맑은 날이면 온갖 종류의 나무가 꽃, 희귀 동물까지 접할 수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오르타 듀오는 제냐트 프로젝트의 하나로 이탈리아 최초의 공공 현대미술관인 로마 국립현대미술관(MAXXI)과 협업해 ‘로마 이야기’에 참여하면서 제냐와 인연을 맺게 됐고, 나중에는 트리베로에 머물면서 생태 연구를 진행하기도 했다.
지난해 ‘지구 식량 공급, 생명의 에너지’를 주제로 내건 2015 밀라노 엑스포 기간에 열린 제냐트 행사 ‘자연 이야기’에서는 바로 이 트리베로에서 발견한 희귀종 딱정벌레 카라부스로 가면과 수트를 제작해 음악과 곁들인 아트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저희에게는 놀랍도록 잘 보존된 자연환경, 나무 심기(제냐 가문은 인근에 50만 여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같은 마을 재생 작업이 흥미로웠어요. 제냐 가문은 지역 커뮤니티와 후손을 위해 소중한 사회·문화적 유산을 빚어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런 행보는 그들이 정신적 지주로 삼는 현대미술의 거장 요제프 보이스(Joseph Beuys)가 부르짖었던 ‘지구상에 더 이상 나무를 심을 곳이 없어질 때까지 나무를 심겠다’고 했던 신념을 상기시킨다고 덧붙였다. 자신의 작업을 ‘사회를 조각하는 것’, 또는 ‘확장된 개념의 예술’이라고 불렀던 요제프 보이스는 독일 녹색당 당원으로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는데, 당시 ‘7천그루의 상수리나무’ 프로젝트 같은 나무 심기 프로젝트를 추진했고, 이것이 그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예술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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