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멈추게 하는, 천 년 고도 속 공간의 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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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04, 2024

글 고성연ㅣ박혜연

예술은 종종 일상의 ‘외부 존재’로 인식되기 쉽고, ‘예술품’이 배치된 공간은 낭만적이고 비현실적인 ‘벗어남’의 공간이 된다. 그러한 비일상적 풍경이 선사하는 기쁨의 순간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짧은 여행이 되기도 한다.
지난 11월 초 아트 컬래버레이션 교토(Art Collaboration Kyoto) 기간에 교토의 지역성이 짙게 배어 있는 고택이나 유서 깊은 사찰에서 조우한 현대미술 작품은 ‘화이트 큐브’ 갤러리에서 마주한 작품보다 더 잔잔하고 오래가는 울림을 줬다. 북적대는 페어의 분위기를 이따금 놀랄 만큼 말끔히 잊게 해주는 장외 전시 특유의 매력이 교토가 품은 호젓한 공간에서 더욱 진가를 발휘했다. 자연이 있고, 새소리가 들리며, 코끝을 기분 좋게 스치는 바람이 함께했기 때문이리라. 자연 속에 놓인 작품을 응시하다 보면 어느덧 명상과 사색(思索) 모드로 이끌리게 되는 공간 사색(四色)!
따로 또 같이, 보스코 소디-가토 이즈미의 우정 어린 교감_료소쿠인
교토에서 가장 오래된 선종 사찰인 겐닌지(建仁寺)의 탑두사원(塔頭寺院, 대사찰 인근에 있는 작은 사찰) 중 하나인 료소쿠인(両足院)에서 열리는 전시를 보기 위해 이른 아침 발걸음을 옮겼다. 14세기 사찰인 만큼 고색창연하지만 매우 정갈한 정원 입구에 당도하자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한 줄로 질서 정연하게 들어가는 다국적 일행을 보고 미소가 지어진다. <黙: Speaking in Silence>라는 제목의 전시는 뉴욕을 주 무대로 활동하는 멕시코 작가 보스코 소디(Bosco Sodi, 1970~)와 일본 작가 가토 이즈미(Izumi Kato, 1969~) 2인전. 고즈넉한 사찰 내부를 비롯해 정원 등 외부에는 강렬한 색과 풍부한 질감의 어우러짐이 매력적인 소디의 단색조 추상 작업과 언뜻 기괴한데 자꾸 보면 귀엽기도 한 알 수 없는 생명체를 조각으로 빚어낸 가토의 구상 작업이 한 공간에 놓인 이색적 풍경이 펼쳐진다. 예컨대 커다란 몸집을 옆으로 누인 가토의 조각상 앞에 이를 마주하는 각도로 배치한 소디의 작은 금빛 조각이라든지 돌덩이에 옅게 금칠을 해놓은 듯한 소디의 덩치 있는 조각과 수려한 나무들을 배경으로 연못가 돌 위에 새초롬하게 앉아 있는 가토의 앙증맞은 조각의 병치 같은 구도다.
두 작가의 전혀 다른 개성을 지닌 작품들이 오래된 사찰 구석구석을 나란히 수놓으며 보물찾기 같은 재미를 관람객에게 선사하는 2인전. 솔직히 처음에는 ‘역사성’과 ‘국제성’, ‘다름의 미학’ 같은 요소를 한데 녹아내려는, 일종의 공식을 따르는 느낌도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볼수록 인간의 생사, 자연, 원시적인 생명력 같은 주제의 공통분모가 느껴지는 조합이기도 하다. 독특한 색감과 물성을 다루는 원초적인 태도도 그렇고 말이다. 수년 전 부산 조현화랑에서 개최된 한국 첫 개인전(최근에도 이곳에서 전시가 열렸다)에서 만난 소디가 어린 시절 치유책으로 미술을 접했고, 작업도 무아지경의 의식처럼 진행한다고 말했던 기억이 샘솟았다. 알고 보니, 둘은 ‘오랜 친구 사이’라고 한다. 비슷한 나이대(50대 중반)인 두 작가는 2007년 도쿄에서 처음 알게 되어 서로의 일상 언어를 전혀 몰라 소통도 잘 되지 않았지만 긴 우정을 이어나가고 있다고. 자연과 재료와의 진중한 대화 속 창의적 교감도 나눴다는 이번 전시의 큐레이팅도 둘이 함께 맡았다.


보스코 소디-가토 이즈미 2인전 <黙: Speaking in Silence>
전시 장소 료소쿠인, 교토부 교토시 히가시야마구 고마쓰초 591
전시 기간 2024년 11월 2~17일
홈페이지 https://www.perrotin.com/exhibitions/izumi_kato–speaking-in-silence-bosco-sodi-izumi-kato/12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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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되고 분열된 자아를 묻는 듯 섬뜩한 ‘허샹위표’ 조각_만슈인
천 년 고도답게 유적도 사찰도 많지만 그중에서도 북쪽 산기슭에 위치한 만슈인(曼殊院)은 일본 황실 출신이 이끈 적이 있기에 유달리 유서 깊고, 무려 8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교토의 오래된 사원이다. 당연히 현대미술 전시를 여는 것도, 사진 촬영도 녹록지 않은 이곳이 교토에서 첫 개인전을 갖는 중국 작가 허샹위(He Xiangyu, 1986~)의 무대가 되었다. 허샹위는 아트 컬래버레이션 교토의 개최와 맞물린 기간에 창고를 개조한 갤러리인 아르트로(ARTRO)에서 열린 라는 전시와 더불어 만슈인에서 펼쳐진 展을 동시에 선보인 작가이기도 한지라 궁금증이 솟을 수밖에 없었다. 1천2백 년 전도 전에 건립되고 에도 시대에 현재의 장소로 이전했다는 이 사원은 고서적과 그림 등 귀중한 문화재도 다수 소장하고 있는데, 낡음 속 범상치 않은 오라가 느껴지는 내부 공간을 거치니 소박하지만 운치 있는 아담한 정원 풍경을 배경으로 한 돌조각들을 맞닥뜨린다. 여러 곳에서 공수한 자연석을 3D 스캐닝으로 만든 금속대에 고정한 작품은 잔잔한 빛을 받아 어색하지 않게 공간에 스며들어 있다.
어쩌면 다소 밋밋한 구성이라고 여겼을 관람객의 섣부른 생각을 살며시 꾸짖기라도 하듯, 만슈인이 자랑하는 가레산스이(枯山水, 물을 사용하지 않고 다양한 크기의 돌과 자갈, 모래만으로 산수를 표현한 일본 정원 양식)의 하얀 정원이 시야에 들어오고, 묘하게 존재감을 뿜어내는 작품이 눈길을 강하게 사로잡는다. 검정에 가까운 어두운 살결에 고개를 살짝 숙인 소년의 모습을 빚어낸 ‘Asian Boy’라는 작품이다. 자세히 보면 이 소년은 허공 속에서 뭔가를 잡으려는 손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는 작가의 이력을 들여다보면 아마도 ‘콜라 캔’이 아닐까 추정할 수 있다. 작가가 자신의 고향인 랴오닝성 외곽의 노동자들과 함께 6만 병의 코카콜라를 끓여 얻은 잔여물을 옛 송나라 스타일의 풍경화를 그리는 데 활용하는 일명 ‘콜라 프로젝트’로 잘 알려져 있어서다. 영어식 이름 표기로 살짝 혼동이 와 처음에는 몰랐는데, 1986년생인 허샹위는 한국에서도 의미 있게 소개된 적 있는 개념 미술가로 서구 소비문화의 영향을 받은 중국 현대사회의 면면을 보여주고, 과감한 메시지를 드러내는 작업으로 아이웨이웨이의 대를 이을 것으로 기대되는 작가다. 서울 송은에서 지난해 봄 열린, 중국 현대미술의 산증인으로 자리매김한 스위스 출신의 저명한 컬렉터 울리 지그(Uli Sigg) 소장품 전시에서 소개된 작가들 중 주목을 가장 많이 받기도 했다(홍콩의 노란 우산 혁명을 표현한 평면 작품, 아이웨이웨이로 추정되는 거구의 사내가 엎드려 있는 설치 작품 등으로 화제가 됐다). 왠지 모르게 정감 가는 하얀 정원의 적요(寂寥) 속 소년상은 아주 오래 뇌리에 남을 듯하다.


허샹위 개인전 <The Memory of Stillness>
전시 장소 만슈인, 교토부 교토시 사쿄구 이치조지 다케노우치초 42
전시 기간 2024년 10월 19일~11월 17일
홈페이지 https://a-c-k.jp/en/associated-programs/he-xiangy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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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함 속, 더 집중하게 되는 루카스 아루다의 세계_다이토쿠지
기억과 상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넘나드는 사색적인 회화로 유명한 루카스 아루다(Lucas Arruda, 1983~)의 작품을 품은 무대(ACK 부대 프로그램으로 기획된 전시)는 교토 시가지의 북서부에 위치한 일본 최대 규모의 선사 다이토쿠지(大徳寺). 다도 애호가라면 꼭 들러야 할 ‘차의 명소’이기도 한 다이토쿠지 내에는 무려 23개의 탑두사원이 있는데, 그중 22개 암자가 차석(茶席, 차를 마시는 공간)을 따로 갖추고 있다. 또 일본 다도의 대가이자 차 문화를 대중화한 주요 인물인 센노리큐(1522~1591)의 목상도 볼 수 있다. 그 자체로 정결하고 차분하며 명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다이토쿠지에서 지구 반대편인 브라질 상파울루 출신의 예술가 루카스 아루다의 작품은 마치 오래전부터 자리해온 것처럼 각 공간에 자연스레 어우러져 있었다. 내면에 쌓인 기억에서 추출한 빛과 그림자로 버무린 미묘한 풍경을 그려낸 그의 작품들은 관객을 잠시 사색의 시간으로 초대하는 것 같았다.
7백여 년이라는 시간의 흔적이 그대로 묻어 있는 벽에 걸린 그의 작품들은 오롯이 자신의 세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작품을 보러 이동하는 짧은 순간마다 길목에서 마주하는, 교토의 고즈넉한 사찰 속 ‘정원’이라는 공간의 환기는 작품 감상 여정을 한층 풍요롭게 만들어주었다. 섬세하게 배열된 돌과 갈퀴로 물을 형상화한 하얀 자갈의 흐름이 눈에 들어왔다. 루카스 아루다가 그려낸 추상과 구상의 경계가 보여주는 ‘모호함’은 관람자인 우리가 끊임없이 그 경계 속에서 의미를 재구성해나가는 시간에 의미를 부여한다. 비일상적인 모호함 속에서 감상자가 헤매는 그 시간은, 몇백 년을 견뎌온 사찰의 넉넉한 세월 속에서 그저 찰나에 불과할 뿐이다. 그 일순간을 충분히 헤매고 즐겨도 될 만큼, 사찰은 세월의 너른 흔적과 자연의 성긴 매력을 온전히 품고 있었다. 그 안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도, 혹은 찾지 않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년에는 다이토쿠지가 또 어떤 작품을 품게 될지 기대된다.


루카스 아루다(Lucas Arruda) 개인전 *멘데스 우드 DM(Mendes Wood DM) 갤러리
전시 장소 다이토쿠지, 교토부 교토시 기타구 무라사키노 다이토쿠지초 53
전시 기간 2024년 10월 31일~11월 7일
홈페이지 https://a-c-k.jp/en/associated-programs/lucas-arru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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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질감을 화폭에 담다, 안드레아스 에릭손_무린안
“직조는 그림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하나의 작품이 된 것과 같다. 뒤에서 서서히 드러나는 유령처럼. 물질의 특성, 착시 효과, 구조가 만들어내는 다양한 시각적 진동. 그리고 흰 캔버스와 원래 캔버스 사이의 경계가 그렇다.”


누가 봐도 한눈에 알 수 있듯 안드레아스 에릭손(Andreas Eriksson, 1975~)의 작품은 자연과 닮았다. 그의 작품은 무엇을 주장하거나 스스로를 드러내려 하지 않고 ‘존재함(being)’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듯하다. 특히 캔버스를 감싸는 직조된 천의 질감이 색 안료에 묻혀 사라지는 일반적인 회화와 달리, 그의 회화는 리넨 특유의 질감이 안료에 의해 더 살아난다. 그는 원초적인 질감을 살려 직조해나가듯 마른 붓놀림으로 캔버스와 염료의 관계를 놀라울 정도로 일체감 있게 표현한다. 캔버스의 원시성을 지켜내며, 터펜틴(유화용 보조제)을 사용하지 않고 단단한 브러시로 얇게 칠하는 방식은 그만의 작업 세계를 농밀하게 드러낸다.
그의 회화적 어법은 자연 속에서 이뤄졌다. 1998년 스톡홀름 왕립예술대학을 졸업한 에릭손은 베를린에서 작업하던 중 자신에게 전자기 과민성 증후군(EHS)이 있음을 발견하고, 요양차 도심을 떠나 스웨덴 남부 신네쿨레(Kinnekulle) 숲과 바네른 호수 근처로 이주했다. 에릭손은 자연이 주는 영감 속에서 무의식적이며 우연에 기댄 터치감과 통제되지 않은 손놀림으로 캔버스 앞에서 염료로 대화해나가는 과정을 화폭에 담는다. 교토의 무린안(無鄰菴)에서 마주한 에릭손의 세계는 그곳과 비슷한 진동으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웃이 없는 암자’, 다시 말해 ‘고요한 정원’으로 해석되는 무린안은 도심에서 조금 벗어난 조용한 오카자키에 위치하는데, 19세기 말 급속한 근대화 시기 저명한 정치인 야마가타 아리토모(1838~1922)가 은퇴한 후 머물 거처로 건축되었다. 정원은 근대 일본 정원의 선구자로 교토시 헤이안 신궁의 정원을 디자인한 오가와 지헤(小川治兵衛)의 손길을 거쳤다. 교토의 사계절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무린안은 ‘산책 정원’이라고도 불리는데, 거닐다 보면 발걸음마다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는 연못과 나무, 그리고 이끼의 향연에 그대로 머물고 싶어진다. 에릭손의 그림 속에 머물고 싶게 하는 평온함과 같은 결을 지녔다.


안드레아스 에릭손 개인전 <Rakuyou>*노이게림슈나이더(Neugerriemschneider) 갤러리
전시 장소 무린안, 교토부 교토시 사쿄구 난젠지 구사가와초 31
전시 기간 2024년 10월 31일~11월 3일
홈페이지 https://ack.jp/associated-programs/raku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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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작고도 큰 존재감을 품은 페어의 미학 아트 컬래버레이션 교토(Art Collaboration Kyoto) 2024 보러 가기
02. 시간을 멈추게 하는, 천 년 고도 속 공간의 마법 보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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