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CULTURE ’23-24 Winter SPECIAL] 지금 우리 미술을 향한, 세상의 달라진 시선_뉴욕(New York) 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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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03, 2024

글 김연우(뉴욕 통신원)

뉴욕(New York) 리포트

“안녕하세요!” 익숙한 언어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환한 미소를 띤 채 한국어로 다정하게 인사말을 건네는 외국인 직원이 보였다. 1960~1970년대 한국 실험 미술을 조명하는 그룹전 <Only the Young>이 열리고 있는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기프트 숍에서였다. 앞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이번 전시는 뉴욕을 거쳐 올해 2월에는 로스앤젤레스의 해머 미술관으로 순회할 예정이다. 최근 1~2년 사이 동서부를 막론하고 미국 전역에 걸쳐 크고 작은 한국 미술 전시가 유난히도 많이 기획되었다. 물론 세계 무대에서 활약 중인 국내 작가는 셀 수 없이 많고, 프리즈 아트 페어가 서울에서 개최되는 등 한국이 국제 미술계에서 주목받는 게 더 이상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오랜만에 찾은 뉴욕의 미술 현장에서는 예전과는 확연히 다른 공기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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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성에서 소멸로—예술이라는 존재의 강력한 힘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의 한국 실험 미술 전시 연계 프로그램으로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된 우리 현대미술가들의 퍼포먼스! 이건용, 성능경에 이어 지난 12월 초 대미를 장식한 김구림의 퍼포먼스는 작가의 작업 ‘The Meaning of 1/24 Second(1/24초의 의미)’(1969) 앞에서 재현됐다. 마이크 앞에 선 퍼포머가 시집을 한 장씩 낭독한 뒤 해당 페이지를 섬세하게 찢어 이젤 앞에 앉아 있는 퍼포머에게 넘기면, 그가 종이를 건네받아 앞에 있는 흰 종이에 목탄으로 시를 옮겨 적었다. 필사를 마친 페이지는 마구 구겨져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던져졌다. 거의 모든 페이지가 찢겨나가 시집 표지만 남을 무렵, 옮겨 적힌 문장으로 가득한 검은 화면은 빽빽한 글씨로 뒤덮여 더 이상 의미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김구림의 ‘생성에서 소멸로’(2015)는 이처럼 한 권의 시집과 하얀색 종이가 ‘소멸’됨과 동시에 퍼포머들의 낭독과 필사라는 행위로 인해 이들이 ‘생성’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MMCA) 서울관에서 펼친 퍼포먼스에서는 윤동주와 김소월, 나태주의 시를 담은 시집 <시로 배우는 예쁜 말>이 낭독되었는데, 이번엔 시인이자 화가 에텔 아드난(Etel Adnan, 1925~2021)의 영문 시집 <Surge>가 낭독되었다. 관객은 이후 바닥에 떨어진 종이 뭉치를 자유롭게 주워 갈 수 있었는데, 마침 손에 닿은 페이지에는 ‘reality(현실)’에 대한 화자의 고찰이 담겨 있었다. 문득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실을 직면하고 재상상’할 수 있게 하는 ‘예술의 힘*’이야말로 국경과 세대를 넘나드는 공명을 이끌어낸다는, 잠시 잊고 있던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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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을 위시해 미국 전역에서 체감할 수 있는 한국 미술의 달라진 존재감
구겐하임 미술관 전시는 한국의 실험 미술이 20세기 아방가르드 미술의 주요한 실천 중 하나를 이뤄냈음을 세계적인 맥락에서 강조했고, 이에 뉴욕 유수의 갤러리도 앞다퉈 실험 미술 작가의 개인전을 연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현대미술 시장 1번지로 꼽히는 뉴욕에 부는 한국 작가 열풍은 심상치 않다. 앞서 동시대 미술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소호의 뉴 뮤지엄에서는 이미래 작가의 개인전 〈Mire Lee: Black Sun>이 열렸고(2023. 6. 29~9. 17), 뉴욕 한복판에 위치한 록펠러 센터 빌딩에서는 박서보, 이배, 진 마이어슨 3인전〈Origin, Emergence, Return>(2023. 6. 8~7. 23)과 함께 한국 작가로는 최초로 이배의 대형 작업 ‘Issu du Feu(불로부터)’(2023)가 록펠러의 채널 가든 플라자에 설치됐다. 지난 재난에 대한 정화의 상징을 담은 21피트짜리 거대한 숯 덩어리 작업은 뉴욕의 고층 빌딩과 대비되면서 이색적인 볼거리를 자아냈다.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한국실 개관 25주년을 기념해 〈Lineages: Korean Art at the Met>을 선보인다(2023. 11. 6~2024. 10. 20). 미술관의 12세기 소장품과 동시대 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병치해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고 미래를 내다보고자 기획되었다. 다가오는 9월에는 한국 작가 이불의 커미션 작업이 미술관 입구의 파사드를 장식할 예정이다. 내로라하는 해외 갤러리들과의 전속 작가 체결 소식도 훨씬 더 자주 들려온다. 2022년 이건용과 손을 잡은 페이스 갤러리는 지난해에는 유영국의 에스테이트와 전속 계약을 체결하고 두 작가의 첫 뉴욕 개인전을 각각 개최했고, 작년 3월 성능경과 전속 계약을 맺은 리만머핀도 올가을 뉴욕에서 개인전을 열 예정이다.
비단 뉴욕에만 한정된 현상도 아니다. BTS 멤버 RM이 오디오 가이드를 맡아 웹사이트 마비 사태까지 일으킨 LA 카운티 미술관(LACMA)의 〈The Space Between〉(2022. 9. 11~2023. 2. 20) 전시에서는 국립현대미술관과 협력해 한국의 근대미술을 다뤘으며, 샌디에이고 미술관에서는 한국 채색화 특별전을, 콜로라도의 덴버 미술관에서는 한국 분청사기 기획전을 열면서 김환기, 윤형근 등의 회화를 함께 전시하고 있다. 또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는 미술관 최초의 한국 작가 그룹전 〈The Shape of Time〉(2023. 10. 20~2024. 2. 11)에서 동시대 작가 28인의 활발한 활동을 조명하고 있다. 미국의 주요 미술 기관에서 한국 미술 전시와 연계 행사가 이토록 집중적으로 열린 적이 또 있었던가? 물론 예전에도 갤러리를 주축으로 한 한국 작가 전시는 많았고, 유명 미술관 컬렉션에서 국내 출신 작가의 작품을 만나는 것이 희귀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중세부터 동시대까지 아우르는 한국 미술의 여러 시기와 장르에 대한 탐구가 이렇게 동시다발적으로 펼쳐진 건 초유의 현상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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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왜 한국 현대미술, 그리고 실험 미술인가?
물론 한국 미술의 존재감이 하루아침에 두각을 나타냈을 리는 없다(아직도 ‘주류’라고 볼 수도 없지만). 2015년 불어온 ‘단색화’ 바람은 어차피 늘 저평가된 우량주를 모색하려는 레이더를 가동하기 마련인 시장의 시선이 머무른 덕에 유행된 일시적인 현상에 그칠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달리 부침은 있을지언정 나름 꾸준히 이어져왔고, 다른 한국 작가에 대한 관심으로 번지기도 했다. 최근 한국 미술의 약진은 전반적으로 커진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에도 영향을 받았음을 부인할 수 없다. 여러 계기가 있기도 했지만 영화나 음악 등 여러 분야의 콘텐츠를 향한 선망이 시너지를 일으켰다. 뉴욕 타임스는 지난해 가을 ‘American Museums Keep the Spotlight on Korean Art’라는 기사를 통해 미국 미술계에서 자리 잡은 한국 여성 큐레이터들의 활약상에 주목하기도 했다. 예컨대 구겐하임 전시는 안휘경 아시아 미술 어소시에이트 큐레이터가 국립현대미술관 강수정 큐레이터와 공동 기획했다. 덴버 미술관 전시는 한현정 아시아 미술 수석 큐레이터가, 필라델피아 미술관 한국 전시는 미술관 최초의 한국인 임원이자 컬렉션 담당 부관장인 우현수 큐레이터가 각각 그 뒤에 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전시는 ‘한국 미술 전담 큐레이터’인 현수아 씨가 맡았다. 한국국제교류재단(KF)과 삼성문화재단의 지원으로 신설된 직책인데, 한국의 정부와 유관 기관, 기업 차원의 후원은 이처럼 또 다른 밑거름이 된다. 2023년 이부진 호텔 신라 대표가 미술관 이사로 선임된 LACMA의 근대미술전 또한 삼성문화재단의 후원을 받았다.
시장 가치 높은 특정 작가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던 예전과 달리, 시대를 넘나드는 한국 미술 전반에 대한 탐구가 이뤄지는 요즘 추세는 흥미롭다. 그 시선의 중심에 실험미술이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는 점도 뜻깊다. 실험 미술은 1960~1970년대 격변기를 맞았던 한국의 독특한 시대상과 맞물려 태동했다. 한국전쟁과 그 이후의 압축 성장, 군사정권의 강도 높은 사회적 검열, 세계화 과정에서 유입된 해외 문물의 영향 등으로 대혼란의 시기를 맞은 한국의 예술가들은 그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고자 노력했다. 기존 사회와 예술계의 보수적인 체제에 반발한 이들이 선보인 급진적이고 새로운 형태의 예술에 대한 반응은 ‘놀랄 노 자’, ‘이것이 작품(?)’ 등의 표현이 가득했던 당시 신문 기사에서 알 수 있듯 예술보다는 괴상한 행위로 여겨지곤 했다. 실험 미술을 이해하려면 당시 한국의 역사와 사회적 맥락에 대한 이해가 따라와야 한다. 한국의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시기에 이러한 기회의 장이 펼쳐지는 건 반가운 신호다. 사실 팬데믹이라는 공동의 재앙을 겪은 세계는 이내 인공지능을 앞세운 4차 산업혁명으로 새로운 변화의 시기를 겪고 있다. 게다가 중동의 무력 충돌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세계 정세가 불안정한 지금, 실험 미술이 펼친 저항의 역사를 돌아보는 건 시기적으로도 의미 있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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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 ’23-24 Winter SPEC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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