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는 단지 생활용품에 불과했던 가구, 조명과 같은 디자인 제품들이 새로운 예술품으로 인정받으며 경매를 통해 팔려나가고 있다. 상품과 작품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유명 아티스트의 작품을 생활 속에서 소비하고 있는 매스컬처 아트의 시대에 빈티지 가구와 수억원을 호가하는 테이블, 소파가 조명받게 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3 명품 피아노 브랜드 플레옐과 함께 디자이한 은하수 피아노. 앙드레 퓌망의 시그너처인 바둑판 무늬가 강렬하다.
4 렌더링 작업 중인 론 아라드. 5 2007년 론 아라드가 디자인한 리스틀리스 라이브러리(Restless Library).
8 나무의 질감과 형태를 그대로 살려 자연에 대한 경의를 표현하는 조지 나카시마의 커피 테이블 작품 밍그렌 II(minguren II). 조지 나카시마의 작품은 정식 벤더인 인엔을 통해 국내에서도 구매할 수 있다.
9,10 조지 나카시마의 작품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아트 빌딩의 모습.
예술과 상품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는 지금, 수많은 예술가들은 대량 생산 시스템을 갖춘 사업자를 만나 대중이 자신의 예술을 소비할 수 있도록 상품화하길 원한다. 안정된 수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중 인간의 삶에 필수적인 요소인 ‘의식주’는 상품화를 통해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아이템으로 통한다. 예를 들어 일본 리빙 브랜드 무지(Muji)에서는 주거 트렌드를 산업화해 조립식 주택을 효율적으로풀어냈고, 유명 건축가들은 기업의 수익 사업을 위한 해결사 역할을 하면서 건축과 인테리어를 매뉴얼화하고 누구든 만족할 만한 샘플 하우스로 완성한다. 또 유명 디자이너의 작품들이 대중 브랜드와 만나면서 상품과 작품의 경계는 더욱 모호해지고 있다. 스타 디자이너인 카림 라시드가 디자인한 신용카드를 수만 명이 사용하고, 루브르박물관을 건축한 세계적인 건축가 장 누벨이 인테리어 디자인을 한 아파트에 사는 시대가 되었으니 말이다. 이상적인 작품을 추구하면서도 반면 현실 속 소비문화에서는 대중적인 상품화를 실현해 그 경계를 없애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엄연히 수준급의 작품에 대한 가치 투자는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다.디자인이 상품화되며 대중 속에 녹아드는 이러한 현상이 고급 예술에 대한 소비의 촉매제가 된다는 점은 아이러니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대중화는 소량 생산 또는 한정판이라는 이름으로 이슈를 만들고 제품군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타깃 선점이 되지 않은 리미티드는 의미가 없으며 고가 제품일수록 영향력 있는 유명인을 내세워독특한 아이덴티티를 구축한다. 이런 현상의 목적은 대중화가 아니다. 트렌드를 이끄는 집단이 되기 위한 노력이며 언제나 새로운 것을 원하는 대중의 호기심을 신뢰로 바꾸는 과정이고 전략이다. 이러한 리미티드 에디션은 전설로 자리 잡게 되고, 이 상품을 리바이벌한 제품이 소비를 자극할만한 가격으로 출시된다. 초기에 출시한 리미티드 에디션에 대한 소유욕이 그대로 대중화된 제품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소비의 극대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 중 하나다. 이처럼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마케팅과 소비 패턴 덕분에 작품과 상품의 경계가 더욱 모호해지며 ‘작품 같은 상품’이 새로운 시장을 이끌어가게 되었다. 최근 화제가 된 신세계 백화점의 제프 쿤스(Jeff Koons) 전시는 마치 수많은 대중을 위한 전시 같지만 실은 수백억의 가치를 지닌작품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예술품 박람회다. 2003년 무라카미 다카시(Murakami Takashi)와 루이비통의 컬래버레이션 역시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컬래버레이션의 붐은 디자인을 알리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지만 진짜 좋은 디자인을 알아보기 어렵게 하는 방해꾼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상업적인 디자인의 범람으로 요즘은 ‘디자인’이라는 이슈가 더 이상 특별하지 않은 대중적인 관심거리로 전락한 면도 없지 않다. 쉽게 말해, 새로운 유행 상품이라는 이름 아래 관심을 끌기 위한 변종이 탄생하고있으며 그것이 또 다른 공해를 양산하는 주범이 되고있다. 하지만 한편에선 화려한 장식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 소수 전략가들에 의해 ‘디자인’의 개념이 재정리되고 있다. 오랜 시간 공을 들인 인간미가 흐르는 작품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조지나카시마의 작품이나 세월의 흐름에 따라 가치를 드높여가는 북유럽 가구와 같은 리빙 디자인 제품들이 이러한 ‘진짜 디자인 찾기 운동’의 발화점이 되어 ‘디자인’이라는 이름이 잃어버린 과거의 빛을 다시 찾고 있는 중이다.
이러한 디자인 가치 투자가 집중 조명됨에 따라 흔하게만 생각하던 조명과 가구 작품 등이 미술 시장에 나오고 있다. 회화 위주의 평면적인 작품이 미술 시장이나 주거 공간 등 한정적인 곳에서 각광받던 시대를 지나 지금은 거실에 놓이는조명과 책장, 의자 등 고가의 작품이 실제 주거에 사용되면서 아트 퍼니처의 신흥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디자인 작품의 소장 가치와 판매 가능성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면서 ‘아트 테크’의 새로운 ‘블루 오션’으로 떠오른 것이다. 억대에 이르는 가구가 활발히 거래되고 있는 현상이 그 현실을 입증한다. 가구는 이제 실용성만이 전부가 아니기에 ‘과학’이라는 단어를 넘어 ‘예술’을 이야기하고 있다. 가구 제작이 기계화되고 새로운 생산 과정이 정착된 이후로 현대 가구 디자인은 더욱 다양하게 진화하고 있다. 기술의 발전, 지역·생활 문화, 소재의 특성 등이 시대상을 반영한 디자인 양식으로 정리되었고, 가구와 조명은 문화와 일상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즉 가구가 기능을 갖춘, 스토리가 있는 하나의 현대 조각 작품이 된 것이다.
20세기 대표 가구 작품으로 분류되는 샬럿 페리앙(Chalotte Perriand), 조지 나카시마(George Nakashima), 론 아라드(Ron Arad) 등 거장의 작품은 수억원을 호가하며 미술계에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내고 있다. 현재 그 가구보다 더‘좋은’ 상품이 즐비한 시점에서도 디자인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한 오리지널 작품과 역사에 기록된 손때 묻은 빈티지 작품이 1천만~2천만원을 호가하며 현재의 디자인 시장을 리드하는 것이다. 형태가 같더라도 소재를 다르게 사용했거나 장인 정신이 살아 숨 쉬는 정교한 마감과 같은 특징을 지닌 소량 생산된 오리지널 가구의 가치가 아직도 우리를 매료시키고 있고,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공장에서 대량생산된 유명브랜드의 상품 속에서도 오리지널 가구들이 살아남는다. 대표적인 샬럿 페리앙의 책장은 상품과 오리지널의 가격이 10배 넘게 차이가 나고 현재까지도 ‘작품’에 대한 가격의 기준이 되곤 한다. 일상 속에서 이러한 가구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역사를 느낄 수 있을 뿐 아니라 사용하는 과정 자체에서 새로운 미학을 탐구한다는 뜻이다. 또최근 디자인 가치 투자 분야에서 주목받고 있는 대표적인 디자이너로는 미적 균형감과 절제를 통해 가장 정제된 인테리어 디자인을 시도하는 프랑스 파리의 앙드레 퓌망(AndreePutman)이나 뉴욕의 로맨 앤드 윌리엄스(Roman &Williams), 밀라노의 로사나 올란디(Rossana Orlandi)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같은 유명 작가들이 제시하는 이슈는 앞으로 디자인 관련 미술계와 산업계에 필요한 촉매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비전문가는 쉽게 구별할 수 없는 서로 다른 소재의 대비, 유동적 라인을 완성하는 작업은 섬세한 감각과 오랜 훈련을 요구하는 어려운 작업이다. 요즘처럼 순간적이고 강렬한 효과 위주의 인테리어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감흥을불러일으키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들 디자인이 지닌 생명력은 디자이너가 범하기 쉬운 오류 중 하나인 ‘사람을 현혹시키는 디자인’이 아닌 지극히 편안한 디자인을 추구하고,보이지 않는 요소에 대한 섬세한 접근에서 비롯된다. 즉, ‘보이는 곳’과 ‘보이지 않는 부분’을 미묘하게 조율하는 감성적인디자인을 브랜드가 잘 활용한다면 상품을 넘어 예술까지 아우를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