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뭇 황량한 풍경이 펼쳐져 있는 미국 텍사스 주에는 한때 거의 버려지다시피 했던 작은 마을이 하나 있다. 미니멀 아트의 거장으로 20세기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도널드 저드가 화려했던 뉴욕 생활을 과감히 접고 이주해 여생을 보냈던 마르파(Marfa)라는 곳이다. 감성이 아니라 이성을 내세우지만 묘한 비례미의 감동을 자아내는 저드의 걸작들이 대자연과 묘하게, 그리고 어쩌면 가장 완벽하게 어우러지는 이 외딴 마을을 한 아트 애호가가 직접 가봤다.
2 엘름그린과 드라그세트 듀오의 설치작 ‘마르파 프라다’. 사진 James Evans, 사진 제공 Galerie Perrotin.
3 화이트 큐브를 탈피한 ‘라 만사나 드 치나티/더 블록’ 공간 내, 빛이 내리쬐는 모습이 인상적인 사우스웨스트 스튜디오.
3, 사진 Elizabeth Felicella/Esto-Judd Foundation Archives, Donald Judd Art ⓒ2016 Judd Foundation / SACK, Seoul.
미국 텍사스 주의 극서부 멕시코 지역을 가로질러 뻗어 있는 치후아후안 사막 한편에 위치한 마르파(Marfa). 2천 명이 채 안 되는 주민들(그나마 그중 일부는 휴가철에만 이곳의 별장을 찾는다)이 거주하는 작은 마을이다. 개인 소유의 전용 비행기가 아닌 일반 항공사 운항편을 이용해 도착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공항인 엘 파소(El Paso) 또는 미들랜드(Midland) 공항에서 각각 자동차로 3시간 이상 떨어진 이곳으로 향하는 여정은 어지간히 마음을 단단히 먹고 감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휴대폰은 수신 신호를 잃기 일쑤인 데다가 1950년대 영화 <자이언트>를 촬영하던 당시 머물렀다던 주연 배우의 이름을 딴 제임스 딘 룸과 엘리자베스 테일러 스위트룸이 인상적인 호텔 파이사노(Hotel Paisano) 외에는 마땅히 숙박할 만한 곳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주변 지인들에게 이런저런 감언이설로 함께 가지 않겠냐고 운을 떼봐도 별 소용이 없을 가능성이 꽤 크다. 그도 그럴 것이 <자이언트>라면 그야말로 허허벌판을 개척해나가는 영화가 아니던가. 하지만 현대미술을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생각을 달리할지도 모르겠다. 마르파는 미니멀 아트(정작 작가 자신은 이런 식의 명명은 좋아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의 대가로 손꼽히는 도널드 저드(Donald Judd, 1928~1994)가 자신과 동료들의 작품을 영구 보존하고 전시하기 위해 발벗고 나서 재건한 도시이기 때문이다.
1981년 아예 마르파로 이주한 그는 생을 다하는 순간까지 뉴욕과 이곳을 오가며 불모의 땅을 비로소 자신의 작품에 딱 어울리는 하나의 전시장으로, 더 나아가서는 하나의 예술 공동체로 일궈내며 평생의 숙원을 이뤘다. 마르파의 황량한 들판에 놓인 저드의 절제미 돋보이는 작품들은 지평선 너머 펼쳐지는 사막, 바람에 흩날리며 춤을 추는 듯한 들판, 그리고 저녁 무렵이면 노을로 물드는 고요한 하늘과 은근히 잘 어우러진다. 이곳을 찾은 관람객이 이런 장관을 바라보며 무아지경에 빠진 순간, 비로소 작품이 완성되는 게 아닐까 싶다. 마르파 곳곳에 저드 재단(Judd Foundation)의 건물이 흩어져 있다. 그 건물들 안에서는 합판, 알루미늄 등 그가 종종 사용하던 재료를 다양한 색상, 길이, 비율로 버무려 나열한 저드의 스튜디오, 그가 직접 디자인한 극도로 ‘미니멀’한 책상, 의자, 침대, 테이블 등 가구, 그리고 그가 생전에 수집한 다른 아티스트들의 컬렉션도 만나볼 수 있다. 마르파가 지금처럼 아트 타운으로 거듭나게 된 데는 뉴욕 시 그랜드 센트럴 역에서 100km 정도 떨어진 소도시에 현대미술 거장의 작품을 대거 영구 전시해 미술 애호가들을 사로잡은 디아 비콘(Dia Beacon) 미술관의 지원이 한몫을 톡톡히 했다. 허드슨 강변 북쪽으로 달리는 기차 창 너머 풍광을 즐기며 가는 여정마저도 유쾌한 디아 비콘. 옛 제과 회사의 공장 건물을 개조해 층고가 높고 탁 트인 이 파격적인 공간에 저드 외에도 같은 미니멀리즘 아티스트로 분류되는 댄 플래빈(Dan Flavin), 솔 르윗(Sol Lewitt) 등은 물론, 마이클 하이저(Michael Heizer),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의 실험적인 대형 작품이 들어서 있다. 저드는 1979년 디아 재단(Dia Foundation)과 협업해 과거 미군 부대 주둔지로 사용되던 마르파의 한 건물을 사들여 별다른 외형의 변화를 주지 않은 채 미술관으로 개조했다. 바로 1986년 마르파에 문을 연 치나티(Chinati) 재단이다.
아무리 감동이 깊다 해도 그저 작품 감상으로만 마르파 여행을 끝내서는 아쉬울 것 같다. 치나티 재단에서 미술관 못지않게 흥미진진한 여러 프로그램을 운영하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이 재단은 칼 안드레(Carl Andre), 댄 플래빈, 존 체임벌린(John Chamberlain), 로니 혼(Roni Horn), 리처드 롱(Richard Long) 등 1960~1970년대 저드와 동시대에 활약했던 주요 작가들의 작품 역시 함께 전시하고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 또 현시대의 유망 작가들을 위한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물론 심포지엄 등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또 일반 방문객에게는 자연과 조화를 이룬 이 방대한 전시장에서 스스로 깨닫고 인식의 범위를 넓힐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결코 과하지 않은 도슨트 프로그램도 제공한다. 저드 재단의 풍부한 아카이브, 치나티 재단의 전시 공간과 프로그램을 접하기 위해서는 사전 예약이 필수다. 또 아티스트가 작업하던 건물과 스튜디오를 비롯해 마르파의 명소를 방문하려고 해도 마찬가지다. 자칫 먼 길을 와놓고도 방문하지 못하는 불상사가 없도록 필히 미리 확인하는 것이 좋다(공식 홈페이지 www.juddfoundation.org, www.chinati.org 참조). 뭔가 끌리기는 하지만 여전히 마르파로 향하는 머나먼 여정이 못내 망설여진다면 괜찮은 대안이 하나 생겼다. 15년이라는 오랜 기간에 걸쳐 복구 작업을 마친 저드 재단의 뉴욕 소호 전시 공간도 2013년 6월 드디어 일반에 공개됐으니 이곳을 먼저 방문한 뒤에 마르파행을 결정해도 좋을 듯하다.
5 저드의 초창기(1956~1958) 유화를 만나볼 수 있는 콥 하우스(Cobb House).
6 ‘라 만사나 드 치나티/더 블록’ 공간의 나바호 룸(Navajo Room).
4, 5, 6 사진 Elizabeth Felicella/Esto-Judd Foundation Archives, Donald Judd Art ⓒ2016 Judd Foundation / SACK, Seoul.
이 작품은 공공 미술을 선보이는 뉴욕 소재의 비영리단체 아트 프로덕션 펀드(Art Production Fund)와 볼룸 마르파(Ballroom Marfa)가 함께 기획해 10여 년 전에 선보이면서 마르파의 새로운 마스코트로 거듭났다. 하지만 플레이보이 잡지사에서 직접 기획해 인근에 설치한 리처드 필립스 작품이 ‘허가받지 않은 광고 아니냐’는 이유로 교통당국의 저지를 받으면서 덩달아 철거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듀오의 설치물을 지지하는 시민들의 ‘마르파 프라다 살리기(Save Marfa Prada)’ 운동이 일어난 데다, 2013년 11월 플레이보이 소유의 작품이 반년도 채 넘기지 못하고 댈러스에 위치한 미술관으로 옮겨지면서 극적으로 명맥을 유지하게 됐다. 숨 가쁘게 살아가는 도시인들이 저 멀리 마르파로 향하는 발걸음을 내딛는 건 결코 쉽게 할 수 있는 결단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니멀리즘의 정수를 느껴보고 싶다면, 그리고 우연히라도 텍사스 근처에 간다면 저드의 영혼이 살아 숨 쉬는, 마을 자체로 ‘대지 미술’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독특하고 아름다운 마을에 꼭 들러보기를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