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출신으로 로맨틱하고 신비한 디자인 세계를 구축한 토르트 분체는 런던과 프랑스 남부의 전원을 오가며 활동하는 자칭 ‘코즈모폴리턴’이다. 자연을 벗 삼아 서정시를 읊조리는 듯한 그의 디자인 세계는 고혹적이면서도 따뜻한 정감을 불러일으키며 보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디자이너로 활약하면서 모교인 RCA의 교수로 일하고 있는 그를 런던 사우스 켄싱턴 근처의 상쾌한 가을 교정에서 만났다.
품격 있는 디테일 속에 로코코 양식이 연상되는 실루엣이 돋보이는 섬세한 디자인, 그리고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풍부한 색감. 유럽을 주 무대로 활약하는 토르트 분체의 디자인에는 고운 결과 우아한 무늬가 인상적인 신부의 면사포를 떠올리게 하는 신비함이 묻어나기도 하고, 크리스마스에 세례를 받는 아기의 눈망울을 생각나게 하는 순결함이 서려 있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어릴 적 추억에 잠겨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하는 따뜻함이 배어나기도 한다. 그리고 국적불명의 정제된 아름다움과 로맨틱한 기운이 느껴진다.
런던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다 아름다운 전원을 찾아 프랑스 남부로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토르트 분체를 그가 1년 전부터 새롭게 터전을 잡고 ‘미래의 재능 키우기’에 열중하고 있는 왕립예술학교(RCA) 교정에서 만났다. 한 달간의 장기 휴가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터라 기운이 넘쳐나야 할 텐데, 목수를 연상케 하는 그의 커다란 손등에는 칼 같은 날카로운 연장으로 베인 듯한 상처가 나 있었다. 작업으로 생긴 상처인가 싶었더니 웬걸, 요리를 하다가 다쳤단다. “하하, 원래 음식 만들다 보면 잘 생기는 사고잖아요.” 그럼, 그렇지. 그는 전원의 풍요로움을 느끼면서 영감을 받기 위해 프랑스로 떠났던 인물이 아닌가. “부르 아르장탈(Bourg-Argental)이라고 리옹 근처의 한적하고 아름다운 곳이죠. 그곳의 스튜디오는 아직도 있어요. 조각가인 아내와 제가 공유하는 커다란 작업 공간이니까요. 그러고 보니 프랑스로 갔던 것도 벌써 5년이 됐네요. 지인들이 많은 이곳이 그립기도 했어요. 공부를 하러 온 1992년부터 2005년까지 10년도 훨씬 넘게 이곳 런던에서 지냈으니까요.”
트랜스글라스 스타 미러 (TranSglass – Star Mirror), 아르테크니카(Artecnica) 2008.
프티 자댕 암체어(Petit Jardin Armchair), 스튜디오 토르트 분체 2006.
컴 레인 컴 샤인 (Come Rain, Come Shine), 아르테크니카/쿠파로카 2003
트랜스글라스, 아르테크니카 2005.
아이스 브랜치(Ice Branch), 스와로브스키 (Swarovski) 2005.
무화과 잎 옷장(Fig Leaf Drawer), 메타(Meta) 2008.
러프 앤 레디 체어 (Rough-and-Ready Chair), 스튜디오 토르트 분체 1998.
이터널 서머(Eternal Summer), 크바드랏(Kvadrat) 2005.
테이블 스토리즈 (Table Stories), 오텐틱스(Authentics) 2005.
윈터 원더랜드 (Winter Wonderland),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 팰리스 2006.
해피 에버 애프터 (Happy Ever After), 모로소(Moroso) 2004.
1990년대를 돌아보며 잠시 회상에 빠진 그의 눈빛을 보니 토르트 분체를 만나면 꼭 잊지 말고 묻고 싶었던 질문이 생각났다. 영국 디자인 박물관과 나눈 인터뷰 기사에 연도별로 정리된 주요 경력이 실렸는데, 1993년에는 “굉장히 좋은 한 해를 보냈다(had a great year)”라고 간단히 적혀 있었다. 그게 못내 궁금했던 것이다. “하하, 그랬나요? 음, 1993년이 특별한 건 내 아내 때문일 겁니다. RCA 학생이었지만 미국에 교환학생으로 갔다가 돌아온 아내와 사귀게 된 게 그해였거든요.”
‘애처가’임을 자처하는 그는 부인 엠마 보펜든(Emma Woffenden) 얘기를 입버릇처럼 자주한다. RCA 커플로 만나 졸업한 뒤 스튜디오를 차리고 디자인 작업을 하는 그의 인생 여정에는 항상 그의 아내가 함께했다. 일에 있어서도, 가정에 있어서도 동반자 역할을 해온 것이다. 미국의 디자인 기업 아르테크니카(Artecnica)와 작업한 인기 높은 유리 공예품인 ‘트랜스글라스(TranSglass)’도 토르트와 엠마의 초기 공동 작업으로 탄생한 1997년도 작품에 기반을 둔 것이다. 재활용 유리병에 다채로운 색감과 형태를 입혀 만들었다는 이 근사한 시리즈는 과테말라 유리 공예 장인과의 합작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는 지난해 아내와 덴마크 에벨토프트 유리박물관(Ebeltoft Glass Museum)에서 ‘아니마 아니무스(Anima Animus)’라는 주제로 공동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아니마는 독일어의 ‘영혼(seele)’에서, 아니무스는 ‘정신(geist)’에서 빌려온 라틴어 용어로 각각 남성의 무의식 속에 있는 여성성, 여성의 무의식 속에 있는 남성성을 뜻한다. “사실 제 아내와 저는 스타일이 굉장히 달라요. 제 디자인은 여성스러운 면이 강한 데 비해 그녀는 굉장히 남성적인 데가 있죠. 그 때문에 서로를 보완해줄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전시회 제목도 아니마, 아니무스로 정했고요.”
사실 흩날리는 꽃송이나 잔잔하게 물결치는 나뭇가지 등을 소재로 삼는 그의 디자인만 보면 당연히 여성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외모로 봐도 다분히 남성적인 면모가 강한 그의 디자인이 여성적인 정감이 담뿍 어린 디자인 색채를 띠게 된 데에는 어머니가 큰 영향을 미쳤다. 텍스타일 디자이너이자 미술사를 가르치는 교사였던 그의 어머니는 아이들 셋을 홀로 키웠다고 한다. “어머니가 일하시는 걸 보고 자란 제게 바느질과 자수를 하는 건 아주 익숙한 광경이었죠. 그러다 보니 호기심을 갖게 됐어요. 미술사와 디자인 서적도 방 안에 가득했답니다. 그런 영향 때문인지 저는 디자이너, 제 누나는 화가가 됐죠.” 토르트 분체가 자수나 퀼트 같은 요소를 자신의 디자인에 접목한 건 다분히 의도적인 동기에서였다. “아마도 2000년대 초반이었을 거예요. 그때는 자수와 같은 여성적인 장식의 느낌을 내는 디자인이 별로 없었어요. 건축적이고, 남성적이고, 매끈하고, 차가운 느낌이랄까요. 하지만 저는 대량생산을 위한 디자인용품에도 자수와 같은 수예를 연상시키는 서정적이고 포근한 감성을 불어넣고 싶었습니다. 다행히 반응이 나쁘지 않았죠.” 덴마크의 텍스타일 전문 업체 크바드랏(Kvadrat)과 작업한 커튼과 카펫 등 ‘패브릭 시리즈’는 이러한 섬세한 수공예 느낌이 물씬 묻어나는 작품이다.
분체는 자신의 작품에 첨단 기술을 접목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손으로 그린 스케치를 디지털 프린팅이나 레이저 커팅 등을 이용해 화사하고 부드러운 느낌의 디자인으로 빚어낸다. 최근엔 HP와 손잡고 3차원(3D) 상감 기법을 적용해 화사하면서도 세련되게 상판을 장식한 ‘분체표’ 미니 노트북을 한정판으로 선보이기도 했다. 두께 1인치에 무게가 1.06kg인 이 제품은 새하얀 바탕에 꽃과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 문양을 디자인 소재로 사용해 분체 특유의 느낌이 배어나는 그야말로 ‘예쁜 노트북’이다.
자연을 벗 삼아 사색을 하고 넓은 스튜디오에서 작업하는 일상을 사랑한다는 그가 느린 말씨로 조곤조곤 설명하는 걸 듣자니 평생 굴곡 한번 없이 순조롭고 평탄하게 살아왔을 듯 보였다. 하지만 실제로 그의 성공은 금세 이뤄지지 않았다. 말씨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히 느리게 찾아왔다. 1994년에 RCA를 졸업한 그는 여느 디자이너 지망생들처럼 자리를 잡기 힘들어 런던에서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하면서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림도 그리고, 디자인도 하고, 시장 조사도 하는 등 할 수 있는 건 다 했죠. 1996년에 스튜디오를 차리긴 했지만, 1990년대 말까진 그렇게 살았던 것 같아요.”
그가 디자인에만 집중할 수 있을 정도로 입지를 다지고 두각을 나타나게 된 건 2000년대 중반. 특히 이탈리아의 명품 가구 브랜드 모로소(Moroso)의 눈에 들면서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모로소에서 해비타트(Habitat)와 함께 선보인 갈런드 라이트(Garland Light)와 스와로브스키와 작업한 샹들리에 ‘나이트 블러섬’이 마음에 들었다고 했죠. 2개의 작품은 느낌은 비슷하지만 목표로 하는 시장이 굉장히 달라 더욱 흥미로워했던 것 같아요. 하나는 명품이었고, 하나는 상대적으로 좀 더 대중적인 제품이었으니까요.” 그는 지금도 미국의 대형 유통 기업 타깃(Taget)과 일하는 동시에 모로소나 메타(Meta) 같은 고급 브랜드와 작업하는 걸 즐긴다. 만약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어떨까? 이 질문에 그는 “그렇다면 대중(mass)을 선택할 것 같다”고 답했다. 그러고는 “두 가지 다 하면 안 되느냐”고 되묻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균형을 맞출 수 있다면 더욱 좋겠죠. 메타에서 선보인 ‘무화과 잎 옷장’ 같은 경우는 아마도 내가 디자인한 작품 중 가장 비싼 가구일 텐데, 이런 작업은 예술가로서의 감성을 일깨워주는 자양분이 되거든요.”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팬이라는 그는 책, 영화, 요리, 산책 등 취미가 다양해 지루할 틈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창조적 영감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전 다양한 사람들과 호흡하고 공명하면서 흥미로운 요소를 찾아내는 걸 좋아합니다. 예를 들어 말(horse)이 있다고 칩시다. 배경이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말은 다채로운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을 수 있는 소재겠지만, 그와 동시에 어릴 적 추억에 얽힌 공통 분모로서의 보편적 속성도 가지고 있어요. 전 그런 걸 디자인으로 풀어내는 거죠.” 그러나 작품으로 승화시킬 만큼 뚜렷한 개념을 잡을 때까지는 역시 시간이 필요하다. “제 경우는 보통 상당히 느리게 진척되죠. 저는 창작 작품의 개념을 잡는 데 꽤 오래 걸리거든요.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 같지만 어느 날 뭔가가 반짝하고 떠오르면 아침에 일어나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죠. 한번 개념이 머리에 자리 잡히면 실제 작업은 굉장히 빨리 하는 편입니다.” 실제로 그가 길이 2~3m가 넘는 기다란 작품을 거의 밤을 새워가며 일주일에 걸쳐 완성한 일화도 있다. 그는 자신의 창작 과정이 한국 기업의 정서와는 많이 다른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 “한국 기업들과도 잠시 일한 적이 있는데 저랑은 굉장히 다르더군요. 규모가 큰 첨단 기업의 특성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빠른 시간 내에 개념을 잡더라고요. 그런 뒤에는 단시간에 다양한 작품을 쏟아내므로 실제로 작업을 하는 데 시간을 많이 투자했던 기억이 납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개념을 생각해내기 위해서는 초기에 머리를 싸매며 오랜 시간을 보내야만 하거든요.”
런던과 프랑스가 제2, 제3의 보금자리가 된 지 이미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토르트 분체의 모국은 여전히 네덜란드다. 1968년생으로 엔스헤데(Enschede)라는 도시에서 자라났고 에이트호번 디자인 아카데미에서 산업디자인을 공부했다. 그는 런던의 다문화적인 면모와 역동성을 흠모한다고 했다. “국제적인 도시로 유명한 암스테르담에서도 머물러봤지만 런던만큼 다양성이 넘치진 않죠.” 그는 국적이나 시민권 등으로 자신의 정체성이 규정되는 걸 꺼린다. 하지만 네덜란드인 특유의 개방적인 태도가 그의 사해동포주의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지는 않았을까? “아마도요. 네덜란드 사람들이 개방적이고 사교적인 편이며 민주주의 성향이 강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어느 나라 출신이라는 게 뭐 그리 중요합니까? 경계를 짓고 편을 가르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저는 온갖 문화가 혼재되어 있고 활기가 넘치는 런던에도 매력을 느끼지만, 프랑스 남부 시골의 작업실에서 산을 벗 삼아 영감을 받으면서 일하는 것도 좋아하죠.”
그가 RCA에서 강의하는 일을 택한 이유 중 하나도 다양한 국적의 재능 넘치는 학생들과 어울릴 수 있기 때문이다. 디자이너로서 작업을 꾸준히 하면서 교수 역할까지 맡고 있기에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지만, 현재로선 은근히 즐기는 눈치다. “작년에는 첫해라 일주일에 세 번은 학교에 들르며 적응 기간을 거쳤습니다. 하지만 모교에 돌아온 건 기쁩니다. 스튜디오에 홀로 앉아 작업만 하면 외롭기도 하거든요. 학교에 있으면 젊은이들과 어울릴 수도 있고, 좋은 기운을 받죠. 올해는 학생들과 함께 보다 다양한 외부 활동을 펼치는 게 목표랍니다.” 마침 그는 해마다 9월 중순에 열리는 런던 디자인 페스티벌을 앞두고 RCA가 주최하는 야심찬 행사를 위한 준비에 한창이라고 했다. 일부 우수한 졸업생의 작품을 선정해 ‘RCA 디자인 프로덕트 컬렉션(RCA Design Products Collection)’이라는 이름으로 내놓는 새로운 시도다. “소량일 수도, 대량생산일 수도 있지만 RCA 학생들의 가치 있는 작품을 상업화한다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둡니다. 그중엔 한국 출신도 있지요. 올해는 밀라노 가구박람회에서 학생들과 함께 전시를 했고, 이번엔 런던 디자인 페스티벌에서 이러한 행사를 하게 된 거죠.” 디자이너와 스승으로서의 삶, 2개의 길을 동시에 걸어가는 인생에 대해 차분히 얘기하는 그의 눈동자에선 은근한 설렘과 생기가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