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패션의 변하지 않는 본질 fabric delux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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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01, 2010

에디터 배미진 | photographed by yum jung hoon

얼핏 보면 그닥 특별할 것 없는, 이름마저도 낯선 브랜드의 울 스웨터가 수백만원을 호가하는 것을 보며 ‘도대체 왜?’ 라는 의문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브랜드 로고 하나 새겨져 있지 않은 옷에 그만한 값을 지불하는 이유는 분명히 있다. 바로 브랜드의 역사와 노하우가 담긴 특별한 ‘소재’ 때문이다.


유행과 디자인을 초월하는 하이엔드 소재의 가치


패션의 단계를 하나씩 밟아나가다 보면, 보다 근본적인 요소에 큰 가치를 두게 된다. 당장 유행하는 화려한 디자인보다 시간의 가치를 느낄 수 있는 클래식한 것을 찾게 되고, 브랜드의 역사와 디자인의 완성도를 철저히 검수하며 친환경 브랜드인지, 중국에서 만든 제품은 아닌지 꼼꼼히 따져본 후 종합적인 가치를 매기게 된다. 그중 가장 높은 단계에 이르게 되면 그 무엇보다 ‘어떤 소재’를 사용했는지가 결정적인 판단 기준이 된다. 예를 들어 캐시미어 스웨터를 구입한다면 생산 지역과 캐시미어의 종류, 희소성을 꼼꼼히 따진다. 진짜 좋은 것을 구분할 줄 아는 안목을 갖춘 사람이라면 그 좋다는 캐시미어도 모두 다 같은 캐시미어가 아니라는 것을, 입어보면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가장 값진 것으로 꼽히는 하이엔드 소재라 하면 비큐나와 알파카, 캐시미어 등을 들 수 있는데, 이 소재들을 얻는 과정은 굉장히 섬세하다. 대부분 법에 의해 보호받는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의 털을 이용하기에 자연 상태에서 털을 깎지 않고 골라내는 것만을 모아 사용하는 데다 화학적 가공에 민감해 최대한 천연의 느낌을 살려 완제품을 만들게 된다. 남미에 서식하는 야생 캐멀류 중 하나인 비큐나는 털을 깎는 주기가 3년이기에 가격이 매우 높고 ‘부드러운 금’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을 정도로 귀하다. 비큐나 소재로 만든 스카프는 1백만원 이상, 코트는 2천만원 이상이다. 알파카는 남미의 캐멀류를 가축화한 품종으로 털이 양의 울과 비슷하지만 광택과 부드러움이 더 뛰어나고 머리카락 정도로 굵기가 얇다. 최상품 알파카 섬유는 온스당 2~4달러에 거래된다.

이러한 럭셔리 소재로 만든 옷을 구매하는, 소비의 피라미드 최정점에 서 있는 VIP들이 즐겨 입는 옷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백화점 1층에 커다란 매장을 갖고 있는 브랜드의 제품은 아니다. 모든 백화점에 다 입점해 있는 것도 아니다. 압구정동의 갤러리아백화점이나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의 2층 어딘가 조용히 자리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러한 브랜드가 소리 없이 꾸준하게 성업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타 브랜드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최고급 소재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종류의 하이엔드 패브릭을 선보여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는 에르메네질도 제냐, 방수가 되는 캐시미어 스키복을 선보일 정도로 럭셔리 소재 분야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로로 피아나, 염색하지 않은 화이트 캐시미어를 선보이는 아뇨냐, 2백20수 양복 원단을 사용하는 키톤이 하이엔드 소재를 사용하는 대표적인 브랜드다.



완벽한 소재를 위한 럭셔리 브랜드들의 끊임없는 노력


좋은 소재를 사용해 최고의 패브릭을 만드는 것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브랜드, 에르메네질도 제냐, 로로 피아나, 아뇨냐의 공통점은 모두 이탈리아에서 패브릭을 만드는 회사로 출발했다는 것이다. 그중 에르메네질도 제냐는 세계 유수의 디자이너 브랜드에 원단을 공급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연간 200만m에 달하는 패브릭을 생산한다. 이 엄청난 양의 패브릭을 만들기 위해 원산지에서 원료를 직거래하는 방식만을 고집한다. 더 좋은 품질의 원료를 지속적으로 개발하고 꾸준히 수급하기 위해 현지 지역사회와의 관계를 확립하려는 다양한 노력을 기울인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해마다 그해에 생산된 천연 섬유 가운데 가장 품질이 뛰어난 섬유를 선정해 생산자에게 트로피를 수여한다. 1963년 시작된 이 트로피 제도는 호주의 고품질 양모 생산자들과 끈끈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렇게 어렵게 얻은 소재의 가치를 보다 확실히 하기 위해 패션업계 최초로 레이블에 ‘캐시미어’나 ‘울’ 대신 ‘내몽골산 캐시미어’, ‘호주산 초극세 울’과 같이 원산지를 표기하는 것은 노력에 대한 보상을 지역에 돌려주기 위함이다. 로로 피아나는 최상의 캐시미어를 확보하기 위해 베이징과 울란바토르에 있는 로로 피아나 몽골리아 주식회사를 통해 중국 정부 기관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원료를 생산하는 현지에서 제품의 품질을 검사한 후 세계 각국에 위치한 로로 피아나의 패브릭 공장으로 운송하기에 캐시미어의 품질을 철저하게 관리할 수 있는 것이다.

완벽한 캐시미어를 얻기 위한 패션 브랜드의 노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최고의 럭셔리 소재로 꼽히는 비큐나를 사용할 수 있는 독점적인 권한을 가진 여성 브랜드 중 하나인 아뇨냐는 브랜드 시그너처 아이템인 ‘화이트 캐시미어 니트 웨어’를 위해 캐시미어를 직접 생산한다. 인종이 다르듯, 털의 색상이 다른 다양한 종류의 양 중에서 순수한 화이트 컬러의 양털을 가진 양에게서만 채취하며, 털을 깎지 않고 자연적으로 빠지는 털을 골라내는 친환경적인 방법만 사용하고 있다. 양에게 스트레스를 주지 않고 불순물이 전혀 없는 순도 높은 캐시미어를 얻기 위해서다. 게다가 아뇨냐는 특별한 화이트 캐시미어를 사용한 니트를 오래도록 소장하기 위해 특별한 방법을 고안했다. 니트 세탁을 위한 특별한 비누, 화이트 솝(white soap)을 개발한 것이다. 화이트 캐시미어의 부드러운 촉감을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도록 캐시미어 염소 우유를 포함한 천연 성분을 사용했다. 평생 동안 입을 수 있는 가치 높은 소재를 보호하기 위한 방법까지 개발한 것이다. 브랜드에서 이렇듯 가공하기 어려운 소재를 사용하는 것은 단순한 과시용은 아니다. 보온성이 뛰어나고 섬세한 소재를 사용해 얇고 가벼운 옷을 만들어 착용감과 실루엣의 질을 높이려는, ‘좋은 옷’을 만들기 위한 ‘기본을 지키는’ 철학을 가졌기 때문이다. 소재가 좋은 옷을 구입하는 것은 사치가 아니라 투자다. 매일 입을 옷이 없다며 고민할 필요 없는, 완벽한 옷장의 미래를 위한 기초 작업이다. 한 줌에 잡히는 가벼운 캐시미어 스웨터, 빛을 뿌려놓은 듯 반짝거리는 비큐나 머플러라면 지금 당장 지갑을 열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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