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고, 고요하고, 빛나는 검을 현(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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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02, 2019

사진 제공 아트 조선

품고 있는 색이 많기에 그 색을 온전히 담을 수 없어서 검고,
고요함을 다 표현할 수 없어서 깊다. 이진우 작가의 작품에는 거친 표면 속 침착하게 빛나는 찰나의 순간을 마주하는 시간이 선물처럼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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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보다는 속에 집중하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양화를 전공한 뒤 1983년 프랑스로 떠났다. 그곳에서 순수 미술이 아닌 미술 재료학을 공부한 작가는 어쩌면 회화 작품의 겉모습보다는 한꺼풀 드러내야 비로소 보이는 내면 깊은 곳을 관찰하고 탐구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1993년 한국으로 돌아와 새로운 기준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면서 재사용 가능한 한지를 1순위 재료로 여기게 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의 작업은 숯이 놓인 한지를 우직할 정도로 끊임없이 쇠 솔로 긁고 두드리는 강도 높은 작업. 숯을 잘게 부수거나 굵은 알갱이 형태를 유지하며 한지를 스치고, 덮어 얹는 과정을 반복하며 적게는 수 겹, 많게는 수십 겹에 이르는 두께와 질감을 품은 바탕을 만든다. 숯가루 알갱이 크기에 변주를 주거나, 숯가루에 물감을 얹은 표면을 쇠 솔로 긁고 또 긁기를 반복해 불규칙적인 입체 표면을 만드는 과정에서 쇠 솔은 거친 표면을 평평하게 만든다기보다는 반복적인 움직임을 통해 결국 하나의 ‘남김’을 만들어낸다. 검은색이나 회색 혹은 푸른 기가 감도는 한지 표면은 그 안에 축적된 작은 숯 덩어리가 모여 이뤄내는 물질적인 효과 때문에 깊은 무채색으로 덮인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삶과 죽음을 연상시킬 만큼 묵상적인 느낌을 주는데, 이 특유의 오라와 장엄한 분위기가 이진우 작품의 특징. 이진우 작가의 작품은 언뜻 보면 살짝 어둡고 단조로운 듯 느껴지지만, 계속 바라보고 있으면 그 힘에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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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탕에서 태동하는 근작 29점

2017년 이후 2년 만에 한국에서 열리는 개인전은 최선과 최고의 작품만을 선보이겠다는 작가의 다짐을 담았다. 전시 평론을 맡은 케이트 림(미술 저술가, 아트 플랫폼 아시아 대표)은 그의 작품에 대해 ‘바탕에서 태동한 그림’이라 평했다. 프랑스에서 보낸 긴 시간 동안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표현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서구적 요소와 결별한다는 의미로 거의 모든 작품을 불태우기까지 했던 이진우 작가는 한국에서 머물다 2005년 또다시 파리로 떠나 추상화를 시작했고, 2009년부터는 완전한 추상화 작품을 제작하기 위한 현재의 기법에 정착했다. 서구 미술 궤도를 벗어나 다른 길을 택하면서 시작된 작가의 작업은 오랜 시간 몸담아온 흐름을 이탈한 이유, 그가 비판하던 당시 미술계 상황과 어떤 근본적인 차별성을 띠고 있는지는 물론이고, 어떠한 물리적인 노력을 통해 회화의 확장을 성취했는지까지 담고 있다. 이런 작가의 근작 29점을 선보이는 이번 전시는 깊은 산속 혹은 바닷속 살아 숨 쉬는 모든 생명을 담는 ‘바탕에서 태동한 그림’을 소개한다.
이진우 작가는 “작업 과정을 성실한 노동이라 생각한다. 잔꾀 부리지 않고 미련하게 하는 노동. 이런 태도와 생각은 한결같다. 작업의 기본은 하루하루 삶이 하나의 연속성을 이루는 것이다. 일정한 속도로 매 순간 행하는 작업이 꾸준히 쌓여 하나의 선 위에서 결과를 낸다”라고 했다. 마치 매일 200자 원고지 20매는 반드시 채우는, 잘 풀린다고 더 쓰지 않고 안 풀린다고 손을 놔버리지 않는 꾸준함의 상징, 무라카미 하루키 같기도. 빛, 바람, 삶, 죽음 등을 모티브로 작업하며 ‘인간의 생’을 작품에 담지만 절대 표면에 드러내지 않고, 특정 단어에 집착하며 일일이 설명하기를 지양하는 작가의 의도가 충분히 전달되는 작품에서는 깊은 내공과 단단함이 느껴진다. 가을바람처럼 스치듯 다가가 오래오래 바라보고 싶은 작품이다. 10월 2일부터 20일까지 조선일보미술관에서 만나볼 수 있다. 문의 02-724-7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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