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로 뜨거워진 부산의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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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9, 2024

글 김민서

2024 부산비엔날레

부산비엔날레가 예년보다 일찍 개막을 알렸다. 프리즈 서울과 키아프 서울, 광주비엔날레 등 미술계 행사가 집중 포진해 있는 ‘미술 성수기’ 9월이 아닌 8월로 일정을 변경한 것이다. 각 행사의 규모와 지역 간 거리를 생각하면, 미술 애호가 입장에서도 비엔날레 일정을 앞당긴 것이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더군다나 방학이 겹쳐 부산 여행과 비엔날레 방문을 함께 계획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실제로 비엔날레 개막식 바로 다음 날, 부산현대미술관 전시장에는 유독 연인과 가족 단위 관람객을 다수 볼 수 있었고, 2022년 독일 카셀 도쿠멘타에서 반유대주의 논란으로 작품이 철거된 인도네시아 작가 그룹 타링 파디(Taring Padi)의 ‘목판화 인쇄’ 같은 전시 연계 프로그램에는 사람들이 줄지어 기다리기도 했다. 비엔날레가 이렇게 많은 시민들의 관심을 받는 행사였던가? ‘시민들의 축제’ 옷을 입은 비엔날레 풍경이 낯설지만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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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에 입대할 바에는 해적이 되는 것이 낫다(It’s better to be a pirate than join the navy)’는 스티브 잡스가 남긴 전설적인 문장이 떠오른다. 지키는 것이 익숙한 해군보다는 반항적이고 늘 새로운 것을 향해 가는 해적이 되라는 이 슬로건은, 애플을 넘어 실리콘밸리의 창업 정신을 대표하게 되었다. 올해 부산비엔날레는 ‘어둠에서 보기(Seeing in the Dark)’라는 주제 아래,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가 쓴 <해적 계몽주의>, 그리고 ‘불교의 깨달음’이라는 두 개념이 축을 이루고 있다.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해적 계몽주의>를 통해 다문화적인 해적이야말로 관용적이고 때로는 순수한 평등주의 사회를 실천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양성, 평등, 혼돈 등은 현대미술의 정신에 근본적으로 깔려 있는 키워드라서, 사실상 이번 비엔날레 작품을 명징하게 관통하는 주제 선정이라 여기기에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었다. 오히려 스티브 잡스가 그러했듯, 해적들이 보여주는 개척 정신과 시류에 저항하는 정신이 올해 부산비엔날레에 흐르는 전체 맥락이라고 나름 이해해본다.
참여 작가 라인업은 인도네시아, 마다가스카르, 세네갈, 자메이카 등 주류가 아닌 국가와 문화, 그리고 종교인(승려), DJ, 악기 제작자, 안무가, 스트리트 아티스트 등 다양한 배경을 지닌 작가가 대부분을 이룬다. 경남 양산 통도사 성보박물관장을 지낸 송천 스님이 높이 8m, 폭 2m에 달하는 대형 불화 2점을 선보였고,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전 세계를 돌며 작업하는 이두원 작가가 자유로운 회화 작업을 소개했다. 메인 스트림에서 모범적인 코스로 미술을 공부하지 않았지만, 본인만의 세계를 스스로 개척해온 작가들이다. 누구나 알 만한 스타 작가에 기대지 않고, 다채로운 작품을 통해 화두를 던지는 것이 비엔날레만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역할이 아니던가.
우리가 기억해야 할 부산
비엔날레 관람은 부산 원도심에 자리한 근대건축물인 한성1918에서 시작했다. 한성1918은 1918년에 건축돼 한동안 한국 최초의 근대 은행인 한성은행 건물로 사용되다가 2000년대에 부산시에서 사들여 리모델링한 복합 문화 공간이다. 붉은 벽돌 건물 내부에 골조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이곳 1층에는 미국 출신 작가 니카 두브로브스키(Nika Dubrovsky), 프레드 모튼(Fred Moten) & 스테파노 하니(Stefano Harney) & 준 리(Zun Lee), 홍진훤 작가의 작품이 설치되어 있다. 한성1918에서 도보로 5분 정도 거리에 있는 부산근현대역사관 본관은 1963년에 준공돼 한때 한국은행 부산 본점으로 쓰이다가 2023년 12월 역사관으로 새롭게 개관했다. 이미 2018년에 비엔날레 장소로 사용된 바 있는데, 올해는 부산 로컬 카페 브랜드인 ‘까사 부사노(Casa Busano)’가 옛 은행 로비를 화려하게 탈바꿈시켜놓았다. 더군다나 1층 구석 옛 제1금고 자리에 골드 바 모양으로 포장한 디저트를 진열하는 등 장소의 역사를 영리하게 차용해, 원도심에 갈 일이 있다면 한 번쯤 방문해볼 만한 재미있는 곳이다. ‘까사 부사노(부사노의 집)’라는 이름에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는데, 카페 한쪽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부산의 문화를 만들고 알리는 사람들을 우리는 ‘부사노’라고 합니다.’ 이번 비엔날레 전시장으로 사용한 지하 금고미술관도 강철문과 이중 철문, 잠금장치 등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해 관람 내내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이곳에는 한국인 작가 차지량, 이양희, 구현주, 최윤 작가를 비롯해 세네갈 출신 셰이크 은디아예(Cheikh Ndiaye)의 설치 작업 ‘르 파리(2024)’, 소피아 알-마리아(Sophia Al-Maria)의 ‘황소와 곰’(2023) 등이 전시되어 있다. 한편 초량동은 부산역 건너 북쪽 구봉산 기슭으로 가는 길에 펼쳐진 동네다. 부산항을 통해 이 땅을 밟은 외지 상인들과 난민들이 드나들던 부산의 역사를 그대로 품은 곳으로, 한때 일본인들이 정착해 살아 이런저런 양식이 혼합된 근대식 건물이 남아 있다. 초량동 주택가 안쪽 골목에 위치한, 비엔날레 마지막 장소 초량재도 1960년대에 세운 가옥으로 추측된다. 이곳을 비엔날레 장소로 선정한 것은 선박, 즉 ‘해적선’을 떠올리게 하는 독특한 외관 때문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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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의 틀을 벗어난 다채로운 라인업
공간을 발견하는 맛도 좋았지만, 몇몇 작품은 공간과 별개로 잔상이 오래 남았다. 한성1918에서 비엔날레 작품 중 가장 처음 접한 니카 두브로브스키의 영상 작업 ‘파이트 클럽’(2022)은 이번 비엔날레 주제에 영향을 준 데이비드 그레이버 사상에서 영감받은 작품이다. TV 토론을 패러디한 듯한 이 영상에는 작가의 남편이었던 데이비드 그레이버, 그리고 철학자 토머스 홉스와 장-자크 루소 역을 맡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철학적 거장들의 대결을 무대에 올려 현대사회를 형성하는 근본적인 사상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게 한다. 성악설 vs 성선설, 중앙집권적 권력 vs 개인의 권리와 민주주의 등 30분 24초의 러닝타임이 전혀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흥미진진한 대결이다.
부산근현대역사관 지하 복도에 전시돼 이목을 끌었던 구헌주 작가의 작품 ‘무궁화 해적단’(2024)은 이번 비엔날레 주제에 영향을 준 ‘해적’의 이미지를 전면에 적용했다. ‘Kay2’라는 스트리트 아티스트로 활동하는 작가는 한국 전직 대통령의 초상화에 그래피티로 해적 이미지를 씌우고(민주주의를 훼손했거나 간선제로 당선된 대통령은 제외했다), ‘유럽 계몽주의의 토대가 된 마다가스카르 해적의 민주적 세계는 과연 유토피아였을까?’라는 질문으로 민주주의는 정지되어 있지 않고 이를 지속적으로 개선하는 노력이 필요함을 상기시킨다. 복도를 지나면 어두운 금고 안에서 안무가 이양희의 영상 작품 ‘헤일’(2020)이 발걸음을 붙잡는다. 테크노 비트에 춤추는 영상을 어둠 속에서 한참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새 내 안에 내재된 춤을 향한 욕구를 자극해 영상 속 댄서들을 따라 몸을 흔들게 된다.
예년에 비해 일정을 앞당기는 바람에 무더운 여름 날씨가 우려되어서인지 야외 작품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는데, 그래서 을숙도에 있는 부산현대미술관의 잔디밭에 이두원 작가가 옮겨 놓은 캐러밴에 더욱 눈길이 갔다. 특히 어린 관람객들의 관심을 끈 이 캐러밴은 그 안에 식물로 가득 채운 작가만의 소우주가 펼쳐져 있다. 작가의 스타일대로 알록달록한 그림으로 겉을 치장했지만, 사실상 문을 열고 들여다보기 전까지는 사람의 소우주, 즉 진짜 내밀한 세계는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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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 다시 희망을 찾아
이번 부산비엔날레는 개막일부터 미술관이 북적거릴 정도로 시민들에게 한 발짝 다가간 것으로 보였지만, 모순되게도 관람 친화적이지 않은 환경이 여러모로 아쉬웠다. 앞서 말했듯 비엔날레 전체를 관통하는 큰 주제 의식이 미약하고, 그래서인지 각 작품과 작가 설명을 이해하기도 인지하기도 어렵다(종이에 번진 듯한 작은 QR코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데다 근현대역사관 지하에서는 무선 인터넷 신호가 잘 잡히지 않았다). 먼저 주제를 정하고 난 다음에 참여 작가 라인업을 세운 것이 아니라, 두 작업(주제 선정과 라인업 구성)을 동시 다발적으로 상호작용시키면서 비엔날레를 준비했다는 공동 전시 감독 필립 피로트(Philippe Pirotte)의 대답에서 이 아쉬움의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또 부산 원도심의 새로운 공간을 발굴해 소개한다는 목적이 무색하게, 전시 장소에 관한 설명과 선정 이유, 배치한 작품들과의 관계성을 전시장이나 웹사이트 어디에서도 파악할 수 없었다. 단순히 ‘대한민국 제2의 도시’라서가 아니라 어째서 ‘부산’ 비엔날레인지 정체성을 더 드러낼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9월 7일에 시작한 광주비엔날레와 협업해 동시 입장권을 판매하기로 한 결정은, 지역 갈등을 넘어서는 고무적인 행보라 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기성을 파괴하고 새로움을 개척하는 해적 정신이 아닌가. 몇몇 아쉬움에도 여전히 이 매력적인 항구도시 방문을 추천하게 하는 2024부산비엔날레는 오는 10월 20일까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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