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쇼크는 호모 라보란스에게 절망일까, 희망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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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01, 2015

에디터 고성연

2030년이면 일흔 살도 노인이 아니라 ‘신중년’이라 불릴 것이라는 전망이 그리 어색하게 들리지 않는 요즘이다. 80세까지는 노동을 ‘벗’해야 삶이 빈곤하거나 지루하지 않을 듯하다는 점도 그렇지만 극히 낮은 출산율 때문에 고령 인구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구조적 문제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그런데 이런 인구구조가 디스토피아를 초래하기는커녕 오히려 ‘답’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 대두돼 흥미롭다. ‘미생’들의 노동력에 대한 인식이 바뀔 수 있다는 장점 등을 내세우면서 말이다. 마냥 낙관해서도 안 되겠지만 어차피 되돌릴 수 없는 흐름이라면, 성장 없는 번영이 가능한 사회와 국가를 설계하는 데 미리 초점을 맞출 필요도 있지 않을까 싶다.


후진적인 모습을 기억하기란 힘든 나라지만 제2차 세계대전 패전국인 일본은 1950년대 후반만 해도 대부분 먼지 가득한 비포장도로로 뒤덮여 있었다고 한다. 일본의 경제성장에는 당연히 여러 동인이 있지만 1964년 도쿄올림픽이 큰 계기로 작용했다. 인구구조 변화에 기반한 주식 투자의 틀을 제시하는 자산 운용 전문가 밥 프뢰리히 박사는 도쿄올림픽 이후 일본이 무려 20년간 성장 가도를 달렸다면서 2008년 베이징올림픽이 중국에 바로 그러한 전환점이 되어줄 것으로 내다봤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IMF 사태’ 같은 성장통도 겪긴 했지만 올해 1인당 GDP(국내총생산)가 3만 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되므로 88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보면 1인당 GDP가 10배 가까이 증가할 정도로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는 셈이다. 물론 스포츠 이벤트를 꼭 경제 효과와 이미지 제고를 노린 국가나 도시 차원의 ‘프로젝트’로만 바라봐도 안 되겠지만, 인천아시안게임이나 평창동계올림픽을 둘러싼 최근 잡음들만 봐도 이제는 낙관론은커녕 폐해를 막기 위해서는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야 한다는 의견에 더 무게가 실린다. 심지어 매머드급 이벤트 자체의 경제 효과란 건 원래부터 없고, 단지 성장 잠재력이 터지기 직전인 나라들이 그런 국가적 행사를 기점으로 더 신나게 질주할 수 있었던 것이라는 논리도 설득력 있게 개진되고 있다. 즉, 타이밍이 좋았다는 얘기다. 또 당시에는 인구구조상 보다 ‘젊은’ 나라들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2000년대 초·중반부터 중국이 그런 궤도에 올랐다고 보고 원자재, IT, 헬스 케어 등의 분야에 투자 초점을 맞추라는 프뢰리히 같은 전문가의 예측을 따랐다면(물론 ‘종목’의 적중률은 다른 문제다), 그리고 충분히 장기적인 관점과 행동을 취했다면 적어도 큰 후회는 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인구 변동’이라는 큰 그림 없이 섣불리 미래를 내다보지 말라는 그의 지당한 조언이 요즘 조금 다른 각도에서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대개 현 시점의 인구 변동이라고 하면 인구 규모가 늘어나고 고령화 사회로 치달으며, 저출산이 문제라는 그림을 상식적으로 떠올리지만, 이런 전망을 둘러싼 상반된 시각이 대두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단지 투자 차원이 아니라 인류와 경제, 노동의 문제를 좌지우지하는 담론이라 21세기판 맬서스 논쟁을 방불케 한다.

맬서스 논쟁은 시점이 대폭 늦춰진 것일 뿐, 여전히 유효하다(?)

“1900년에 지구 인구는 16억 명이었다. 20세기가 흐르는 동안 세계 인구는 2배로 늘어났다가, 다시 2배로 늘어났다. 우리 별에 공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다 채운 상태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저명한 미국 저널리스트이자 학자인 앨런 와이즈먼은 <인구 쇼크>라는 책에서 이런 질문을 던진다. 그는 16억 명이었던 세계 인구가 2014년 72억 명, 2082년에는 1백억 명을 돌파할 수 있다면서 인구 폭발이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수준으로 내달리고 있으며, 지구는 이를 감당할 수 없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18세기 말 인구 증가세와 자원 고갈의 불균형을 해소하지 않는다면 재앙을 맞이하리라고 주장한 영국 학자 맬서스의 경고는 긴 시간의 터널을 지났을 뿐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다. 탐구욕 왕성한 저널리스트답게 전 세계 21개국을 돌아다니며 인구 문제의 현실과 대안을 속속들이 파악한 와이즈먼은 많은 경제학자들이 인구가 대규모로 유지되기를 바라며 ‘인적 자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진짜 이유는 딴 데 있다고 말한다. 일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이들이 많을수록, 노동력을 더 값싸게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인간이 조정에 나서지 않는다면 자연이 우리를 조정하리라’는 따끔한 경고도 곁들였다.
그러나 우리 중 상당수는 인류의 먼 미래를 심대한 차원에서 걱정하기보다는 조국이나 자신이 속한 지역사회의 가까운 앞날을 우려하기에 바쁘며, 그보다도 당장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맞닥뜨린 상황을 헤쳐나가기에 급급한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고령화와 저출산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 것도 눈앞에 닥친 1백 세 시대에 어떻게 버텨나갈 것인지, 그토록 열심히 국민연금을 부어왔지만 정작 은퇴하면 누가 그 재원을 채워줄 것인지, 조금 더 나아가면 노인 인구를 부양하기에 후세대의 경쟁력이 심히 도태되지 않을지를 걱정하는, 지극히 현실적이면서 다분히 자기 본위적이기도 한 염려가 깔려 있어서일 테고 말이다.

‘인구 절벽’은 정말로 노동 경쟁력을 갉아먹을까?

한국도 고령 사회 초기에 들어선지라 이런 사안은 먼 일이 아니다. 최근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2018년이면 이미 인구 대비 65세 이상 인구의 비중인 ‘고령화 비율’이 14%를 돌파하고, 2026년에는 초고령 사회에 진입할 것으로 보인다. 생산 가능 인구(15~64세)가 본격적으로 감소하는 ‘인구 절벽(demographic cliff)’이 머잖아 닥친다는 얘기다. 보건복지부에서는 “2016~2020년은 부양 부담이 낮은 마지막 인구 보너스 기간”이라고 밝혔다. 그런 와중에 투자 전문가인 해리 덴트는 <2018 인구 절벽이 온다>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한국에서 출산 인구가 가장 많았던 1971년생의 소비가 정점을 이루는 2018년을 기점으로 수십 년간 내리막길을 걷게 될 것이라면서 대대적인 디플레이션이 예상되므로 여러 차원의 대비책이 시급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출산율을 끌어올리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강조한다. 굳이 덴트의 전망이 아니더라도 한국은 인구 소멸 1호 국가로 지명될 정도로 출산율이 극히 낮은 편이다(1.2명 수준).
은퇴 계획은커녕 생산 가능 인구다운 사회 진출과 안착을 버거워하는 2030세대가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한 ‘삼포 세대’로 불리는 한국의 암울한 현실에서 인구 변화는 어느 방향으로 해석되고, 흘러가야 할까? 강제 규제 같은 야만적인 방법은 아니지만 자발적인 ‘인구 억제’를 외치는 와이즈먼이나 노동 경쟁력을 위한 ‘출산 장려’를 강조하는 덴트나 한국 전문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한국에 대한 언급을 아예 빼놓지는 않았다. 평균 출산율이 최저 수준인 한국과 세계적인 인구 폭발과 무슨 관련이 있느냐고 반문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와이즈먼은 인구가 줄어들어 국가 GDP가 감소하더라도 국민의 1인당 국민소득이 낮아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인구통계학적 운명은 거스를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성장 없는 번영을 꾀해야 하는 일본의 예를 든다. 이 같은 설명을 뒷받침하는 일본 정책연구대학원 명예 교수인 마쓰타니 아키히코의 얘기는 꽤나 흥미롭다.



성장 없는 번영이 가능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우리는 국내총생산을 늘리는 데 강박적으로 집착해왔어요. 하지만 GDP는 인구가 줄어드는 경제에서 생활수준과는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일하는 사람이 적으니 총생산량도 줄어들겠지만 1인당 생산성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1인당으로 따지면 변하는 게 거의 없을 겁니다.” 마쓰타니는 인구 감소로 개인의 삶이 더 나빠질 이유는 없다고 말하면서 오히려 국가 차원에서는 지방 분산의 기회가, 노동자에게는 삶의 질을 높이는 기회가 올 수도 있다고 낙관한다. 처음에는 기업이 임금을 낮추거나 노동자를 줄여 비용을 절감하려 하겠지만 노동자가 더 귀해질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기업도 있는 직원이 떠나지 않기를 바라게 될 것이라는 논리다. 이 지점에서 이주 노동자라는 대안을 떠올리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는 이에 대해 반박한다. 대규모 이민자에 의한 사회문제를 떠나서라도 2030년까지 노동력을 현재 수준으로 유지하려면 이민자 2천4백만 명을 받아들여야 할 텐데, 그건 불가능하다고. 독일은 또 하나의 예로 꼽힌다. 와이즈먼은 독일 경제가 새천년 초기의 10년에 걸친 경기 부진과 침체에서 회복되기 시작했는데, 인구가 줄어든 시점이었지만 2010년 독일은 기록적인 경제성장률을 보였음을 지적했다. 또 공산주의의 해체로 혼란에 빠진 탓에 일본보다도 먼저 인구가 급감했으나 21세기 들어 경제가 성장한 러시아의 경우에는 2009년에 오히려 인구가 15년 만에 증가했는데, 이는 출산율이 높아져서가 아니라 ‘구소련’에 속했던 나라에서 오는 이민자가 늘어났기 때문이라는 통계도 제시된다. 버몬트대의 경제학자 조슈아 팔리의 논점도 흥미롭다. 그는 “경제의 상위 10%가 이자를 받는 이들이고 나머지 90%는 이자를 내는 이들이기 때문에, 현재 이자 지불액은 본질적으로 하위 90%에서 상위 10%로 부를 이전하는 수단”이라며 은행이 아니라 정부가 돈을 만들어낼 권리를 가지게 함으로써 안정된 생태계를 구축하면 일자리의 창출과 유지가 보다 순조롭고 부의 혜택도 골고루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극단적인 주장을 펼쳤다. 인구 감소와 부의 재분배는 인류가 미래를 살아가기 위해 고려해야 하는 동전의 새로운 양면이라는 것이다.

어차피 흐름을 되돌릴 수 없다면…

팔리 스스로도 인정했듯이 이는 실현 가능성이 낮은 이상적인 시나리오일 것이다. 물론 은행이 누리는 권리를 없애자는 팔리의 주장처럼 극단적이지는 않을지라도 ‘이상’에 가까운 모습을 지닌 예도 있긴 하다. 인구 규모는 크지 않지만 전반적인 삶의 수준이 높고, 다수가 골고루 부를 부리는 일부 북유럽 선진국에서는 적극적으로 출산을 장려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개개인을 국가 경쟁력을 채워줄 ‘노동력’으로만 보고 출산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는 아주 부러운 극소수의 예다. 자원이 부족한 우리로서는 노동력까지 달리면 경제성장이 멈출뿐더러 고령 인구를 부양할 후세대가 없어져 결국에는 모두가 빈곤의 높에 빠지지 않겠냐는 걱정이 들 법도 하다. 그러므로 나라가 못 살면 내 몫도 줄어들므로 조금은 부유층이 더 가져가더라도 그나마 ‘상향 평준화’가 낫지 않은가 하는 생각 역시 꽤 일리 있게 여겨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구의 인구는 여전히 폭발적으로 증가하는데 한국은 인구 절벽을 향해 가는 현상을 놓고 회색빛 전망만 쏟아지던 차에, 마냥 장밋빛 전망은 아닐지라도 인구 감소를 낙관하는 희망론은 꽤 반갑게 들리는 측면이 있다. 어차피 인구 변동은 큰 동인이 뒷받침되지 않고는 되돌릴 수 없는 흐름일 거라는 전망이 현실적이지 않은가. 일본이나 싱가포르만 보더라도 정부가 출산율을 높이려고 온갖 당근책을 제공해도 별 효과가 없었다. 해리 덴트를 비롯해 상당수 학자들은 한국이 일본에 22년 후행한다고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적어도 대책을 세울 수 있는 여지는 여러모로 더 많은 셈이다.
특정 국가의 인구가 적든 많든 성장세를 타든 감소세를 타든 인류 전체의 기대 수명은 높아질 것이며, 로봇으로 노동을 대체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인간의 두뇌는 삶의 질을 그에 맞게 향상시키고 ‘디자인’할 수 있는 역량을 지녔다. 게다가 어떻게든 처한 상황에서 최선의 삶을 지향하는 게 ‘행복’을 원하는 인간의 본능이지 않은가. 어느 미국 작가의 말처럼 “비용이 아무리 높아지더라도, 삶은 여전히 인기 있을 것”이니까. 단지 우리가 속한 사회와 국가가 그처럼 인구 쇼크에 대처하는 바람직한 롤모델이 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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