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세함과 담대함이 돋보이는 영국의 미래주의 여성 건축가 겸 디자이너 amanda leve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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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5, 2011

글 고성연 기자(영국 런던)

남성들이 지배하는 세계라 여겨지는 건축 분야에서 자하 하디드(Zaha Hadid)라는 여성 거장을 배출한 영국에는 최근 여러모로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여성 파워’가 한 명 더 있다. 영국의 3대 랜드마크로 꼽힐 정도로 유명한 버밍엄의 셀프리지 백화점 건물을 탄생시킨 건축 회사 퓨처 시스템즈의 ‘안주인’ 역할을 20년간 맡아오다가 현재는 자신의 이름을 딴 스튜디오를 활기차게 경영하고 있는 아만다 레베트(Amanda Levete)다.


            

  

 


원래 이라크 출신으로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통하는 프리츠커 상을 받은 자하 하디드가 ‘여제’로 불린다면 금발의 백인인 아만다는 아마도 ‘백작부인’ 정도가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우아한 외모만을 본다면 말이다. 하지만 그녀의 건축 행보를 보면 고상한 백작부인이라기보다는 여성 특유의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갖춘 현대형 여전사에 가깝다. 결코 억세어 보이진 않지만 은근한 고집과 추진력, 배짱으로 커리어를 개척해낸 야무진 캐릭터다. 그리고 아만다는 언론에서 눈독을 들이는 드라마틱한 인생사로 더욱더 유명세를 타온 안타까운 인물이기도 하다. 그녀의 전남편이자 20년간 건축 동반자였던 체코 출신의 천재 건축가 얀 카플리츠키와의 이혼(2006), 3년 뒤 맞이한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 등 일련의 사건으로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긴 했지만 아만다 레베트를 직접 만나는 건 그래서 약간은 조심스럽고도 들뜬 기분이 드는 일이었다.


자유분방하고도 우아한 그녀를 닮은 노팅힐의 스튜디오

런던 서쪽의 노팅힐에 자리 잡은 그녀의 일터는 항공기 격납고를 연상시키는 커다란 창고형 공간이었다. 허름한 느낌의 건물 외벽에 환한 핑크빛 문이 유난히 튀어 웃음을 머금게 만들었는데, 안으로 들어가니 더욱 독특한 분위기의 사무실 풍경이 펼쳐졌다. 흰색 책상과 의자들이 즐비한 가운데 길게 깔린 카펫은 온통 엷은 핑크색. 수십 명의 직원이 거의 다 맨발로 그 위를 거닐고 있었다. 깔끔한 흰색 셔츠를 입고 나타난 아만다 레베트 역시 가뿐한 맨발이었다. 50대 중반이란 사실이 믿기지 않는 ‘동안’과 작지만 다부진 맵시 있는 몸매를 지닌 그녀는 “핑크 계열의 색상을 좋아하냐”는 질문에 “사람들이 길을 잃지 말라고 눈에 띄는 색을 골랐다”고 설명한 뒤 싱긋 웃으며 “사실은 좋아한다”고 말했다. 소녀와 같은 귀여움과 단아하고도 당찬 커리어 우먼의 요소가 혼재된 묘한 분위기가 풍겨났다.


꾸준히 고수해온 미래 지향적인 디자인의 신념

소파에 자리를 잡고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니 그녀가 영국의 대표적인 디자인 브랜드인 이스태블리시드 & 선즈(Established & Sons)와 손잡고 내놓은 작품들의 모형이 시선을 잡아 끌었다. 그중 이름처럼 물 흐르는 듯한 자태가 빼어난 새하얀 ‘드리프트(Drift)’ 벤치에 시선이 꽂혔다. 그녀는 E & S와의 성공적인 협력 관계를 계기로 가구 디자이너로서도 명성을 날리고 있다. “가구 디자인도 참 좋아해요. 대규모 건축 프로젝트에서 얻기 힘든 세밀하고 친밀한 작품의 완성도를 느끼면서 작업할 수 있으니까요. 일종의 해방감을 가질 수 있죠.” 그녀의 건축과 가구 디자인은 어딘지 모르게 닮았다. 당연한 얘기일 수도 있지만 ‘아만다 레베트’라는 꼬리표를 단 건물의 외벽을 타고 흐르는 곡선미와 가구의 선을 보노라면 같은 테두리 안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게 느껴진다. “네, 저의 건축이나 가구 디자인은 기본적인 맥락에선 같아요. 같은 방식으로 다른 분야의 디자인을 하는 것이죠.” 그렇다. 대담하고 날렵한 선이 돋보이는 그녀의 의자 디자인에서는 미래 지향적인 건축 철학이 또렷이 엿보였다. 유려한 곡선을 특징으로 하는 유기적인 형태가 하이테크의 기법을 통해 빚어지는 그녀의 진보적인 디자인 세계는 분명 전 남편의 영향을 받았다. “학생 때부터 그런 미래주의에 심취해 있었어요. 물론 얀의 영향이 매우 큰 게 사실이고요.” 그녀는 부정하지 않았다. 은빛의 알루미늄 원반 1만5천 개가 조화를 이루며 독특한 외벽의 곡선미를 뿜어내는 작품인 버밍엄의 셀프리지 백화점은 아만다와 그녀의 전 파트너이자 남편 얀 카플리츠키의 디자인 색깔을 잘 보여준다.


반항기 가득했던 소녀 시절,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자그마한 체구에 단아하고 여성스러운 외모만 보면 여리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아만다 레베트의 눈빛은 다른 이야기를 말한다. 누구보다도 강인하고 자유분방하면서도 뚝심이 있는 눈매다. 실제로 아만다는 ‘자유로운 영혼’에 가깝다고 털어놓았다. 소녀 시절에도 반항기가 넘쳤으며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덤벼들었고, 싫으면 미련 없이 그만두고 떠났다는 것. 하지만 건축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단다. “집안 환경이나 성장 과정에서 특별히 건축에 대한 영향을 받은 적은 없었어요. 다만 그림을 좋아하고 잘 그리는 편이어서 런던의 해머스미스에 있는 예술 학교로 진학했죠. 하지만 별 재미를 못 느껴 1년 만에 그만뒀어요. 하지만 집에선 미술 공부를 한다고 했을 때도,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도 별다른 간섭을 하지 않았죠.” 예술 학교를 떠난 그녀는 유럽을 여행하다가 돌연 미국으로 향했다. 10대의 풍성한 호기심을 충족시키며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뉴욕의 한 식당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기도 했다. “그때 같은 식당에서 일하던 요리사가 줄리언 슈나벨(영화 <바스키아>의 감독)이었어요. 재미있는 경험이었죠.” 이처럼 즐거운 방랑을 마친 그녀는 런던으로 돌아와 AA에 들어가 건축을 정식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기초 공부 없이도 세계적인 명문 건축 학교인 AA에 들어가다니, 운이 좋았던 걸까? “글쎄요. 책을 많이 읽다가 흥미를 가지긴 했지만 사실 따로 준비한 건 없었어요. 수학을 많이 공부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포트폴리오로 제출한 그림만 보고 괜찮다고 하더라고요.” AA를 무사히 졸업한 그녀는 유수의 건축 사무소에서 실력을 쌓다가 영국의 건축 대가 리처드 로저스 경을 상사로 맞이했다. 4년 넘게 함께 일하면서 그녀 인생의 멘토이자 친구가 된 인물이다. “참으로 인간적이고 관대하고 영감이 가득한 분이에요. 정말로 감사하게 느끼는 소중한 인연이죠.”


인생과 건축의 동반자를 만나다

얀 카플리츠키라는 인물을 논하지 않고 아만다 레베트의 인생을 얘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1968년 러시아가 침공했을 때 체코를 떠난 얀은 렌조 피아노, 리처드 로저스, 노먼 포스터 등 당대의 건축 거물들과 일하며 건축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리고 1979년 퓨처 시스템즈를 설립했다. 30대 초반에 그를 만난 아만다는 카리스마와 재능에 반했고, 1989년 퓨처 시스템즈의 파트너가 된다. 이들은 1991년 결혼에 이르고 아들도 얻는다. 셀프리지와 미디어센터와 같은 걸작도 함께 완성했다. 하지만 2006년 아만다와 얀은 15년간의 결혼 생활을 끝으로 부부의 인연을 끝냈다. 18세의 나이 차이보다는 물과 불, 빛과 어둠처럼 대비되는 성격 차가 더 컸다. 까다로운 완벽주의자이자 ‘불가능은 없다’는 식의 천재형 독불장군이었던 얀과 밝고 외향적이고 네트워킹에 탁월한 그녀 사이에 충돌이 없었을 리 만무하다. “얀은 카리스마가 넘치는 ‘대장’ 스타일이라 할 수 있죠. 난 팀 프로젝트에서 일어나는 시너지를 사랑했고요. 참 많이 달랐죠.” 그녀는 이렇게 회고하며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들에겐 서로를 채워주는 상호 보완적인 측면도 많았다. 얀이 이상주의자였다면 그녀는 조화로운 에너지를 뿜어내는 행동가였기 때문. 그래서 아만다 없이는 퓨처 시스템즈가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을 것이란 얘기도 나온다. 이러한 공생의 미학 때문에 이들의 건축 파트너십은 이혼을 한 뒤에도 몇 년이나 지속됐다. 2007년 각자 재혼을 한 아만다와 얀은 이듬해 마침내 일에서도 각자의 길을 걷기로 한다.


충격적인 전남편의 죽음

일찌감치 조국을 등지고 떠났지만 얀 카플리츠키의 가슴에는 언제나 ‘프라하의 봄’이 새겨져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체코가 민주화된 이래 최초의 국제 공모였던 프라하 국립도서관 프로젝트를 따냈지만 이 야심작을 완성시키지 못한 채 2009년 1월의 어느 날, 길거리에서 돌연 사망했다. 재혼한 부인인 체코의 TV 프로듀서 엘리슈카 푹스코바가 딸을 낳은 지 불과 몇 시간도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안타깝게도 딸의 탄생일에 운명을 달리한 것이다. 그때 아만다는 독립 노선을 걷기 시작한 이래 가장 큰 규모의 프로젝트를 위해 태국 방콕에 머물고 있다가 아들에게 비보를 알리기 위해 고국으로 급히 떠났다. 그리고 며칠 뒤 프라하에서 열린 장례식에서 마주친 전남편의 부인과 갓난 딸. 아만다는 당시의 심정을 영국의 한 신문과 나눈 인터뷰에서 털어놓은 적이 있다. “정말로 끔찍하게 슬픈 날이었지요. 우리는 서로를 안아줬어요. 그런데 더욱 믿기 힘든 사실은 우리 아들이 얀의 생일에 태어났다는 점이에요. 어찌 보면 참 ‘얀다운’ 일이지요.”


삶은 계속된다 – 끊임없는 새로운 도전

이처럼 드라마 같은 일을 겪었지만 애정과 존경심을 담아 추억을 얘기하는 그녀는 담담하고 평온해 보였다.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많아 일이 바쁘고, 재혼해 꾸린 가정에서 3명의 아이를 키우느라 정신이 없다고 했다. “한국엔 아직 가본 적이 없지만 대형 호텔과 쇼핑몰을 짓는 방콕의 프로젝트를 계기로 아시아로 영역을 넓히고 있는 중이에요. 그러고 보니 도쿄에 갔을 때 기억이 하나 떠오르네요. 전자 상점에 가니 모든 종류의 제품이 있는 듯했는데 ‘삼성’ 제품은 잘 찾을 수 없더군요.” 문득 같은 여자로서 솟구친 궁금증. 건강한 몸매와 혈색은 어떻게 유지할까? “점심때 동료들이랑 공원을 돌며 산책을 하거나 조깅을 자주 해요. 피트니스 센터는 싫어하거든요. 여성이 건축 일을 하면 힘들지 않냐고 하는데, 제 경우엔 그렇진 않았어요. 물론 장시간 매어 있어야 하는 일의 특성상 결혼하고 애를 키우면서 일하는 건 만만치 않죠. 건축 학교에선 성비가 5대 5더라도 실제 현장에선 확 바뀌는 게 현실이죠. 그렇지만 육체적으로 힘든 건 잘 모르겠어요.” 그렇다면 세 아이의 엄마 노릇과 세계를 무대로 건축 프로젝트를 병행하는 건 어떨까? “아, 10대 아이가 셋이나 되니 결코 쉽진 않죠. 그래도 그 아이들은 사춘기 시절의 저처럼 반항이 심하진 않아요. 하하.”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새로운 문을 하나씩 두드리고 열면서 꿈을 펼쳐나가는 50대의 모습에서 강인하고 섬세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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